단편
[2ch] 전화박스
벌써 10년 가까이 된 이야기다.
아직 거리 여기저기에 전화박스가 있을 무렵의 이야기다.
어느 3일 연휴 전의 금요일이었다.
나는 대학 친구들과 잔뜩 술을 마신 터였다.
새벽 1시쯤 되서 마무리로 포장마차에 가서 라면을 먹고 그대로 헤어졌다.
그리고 문득 내일은 아무 일도 없으니까 술도 깰 겸 걸어서 돌아가기로 했다.
막차는 끊겼다지만 택시는 쉽게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왠지 그렇게 가 버리면 숙취가 심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때 나는 휴대폰이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한테 [걸어서 돌아갈게요.] 라고 전화하려고 전화박스를 찾았다.
그 무렵에는 간선도로의 버스 정류장에는 대체로 전화박스가 같이 있었다.
가다가 처음 머주친 버스 정류장에서 전화박스에 들어갔다.
무엇인가 이상했다.
희미한 향수 냄새가 풍긴다.
자세히 보니 수화기가 전화기 위에 올려져 있었다.
수화기에 귀를 대자 이미 전화는 끊어져서 기계적인 전자음만 들렸다.
술에 취한 사람이 놓고 갔나 싶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차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동전 반환구에 10엔짜리 동전 6개가 떨어졌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나는 20엔으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고, 나머지 40엔을 주머니에 넣고 걷기 시작했다.
그러고나니 왠지 신경이 쓰였다.
나는 다음 버스 정류장에서도 전화박스에 들어가 보았다.
...역시 수화기가 전화기 위에 올려져 있다.
그리고 똑같은 향수 냄새.
수화기 너머는 전자음만 들렸다.
수화기를 내려놓자 이번에는 10엔짜리 동전이 5개 나왔다.
다음 전화박스에서도, 그 다음 전화박스에서도 같았다.
전화기 위의 수화기.
전자음과 반환되는 10엔짜리 동전.
이제 벌써 19개나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전화박스가 보일 무렵, 그 안에서 나와 걸어가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숨막힐듯한 향수냄새.
거기서도 5개의 10엔 동전이 나와서 모두 24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전화박스.
이번에는 전화박스에서 나가는 사람의 모습이 분명히 보였다.
새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였다.
미소 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여자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전화박스에 들어갔다.
수화기를 귀에 댄다.
고함 소리가 들렸다.
[너, K지? 이제 이런 짓은 그만둬! 제발 그만 해 줘. 우리는 잠도 제대로 못 자서 너무 지쳤어. 한 번 제대로 이야기라도 하자, 응?]
나는 무심코 전화를 끊었다.
차르륵하고 반환되는 10엔짜리 동전들.
[왜 마음대로 전화를 끊는거야? 방해하지 마.]
뒤를 돌아보니 내 등 뒤에서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 떠오른 깨끗하고 흰 얼굴이 싱글싱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저기, 방해, 하지마.]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은 깨끗한 얼굴에, 너무나 무섭고 무서워서 도저히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전화박스를 뛰쳐나와 전력으로 달렸다.
집까지 나머지 2km을 6분 안에 달렸던 것 같다.
도중에 라면을 토했지만 필사적으로 계속 달렸다.
집이 보일 무렵 나는 주머니에서 10엔짜리 동전을 모두 버려버렸다.
등 뒤에서 언제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올지 몰라 정말로 무서웠었다.
그리고 며칠 간은 옷을 갈아 입고 목욕을 해도 향수 냄새가 따라다녔다.
그 여자가 사람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한밤 중에 간선도로를 방황하면서 [그것]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무언전화를 걸고 있었던 것일까.
몇 개의 10엔 동전을 가지고 다녔던 것일까.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무서운 체험이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술을 마시고 나서는 걸어다닐 수가 없다.
출처 : The Epitaph ; 괴담의 중심(http://cafe.naver.com/theepita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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