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녀의 방에 어서오세요 -6부-

지구별방랑자 2013.07.18 13:58:03
지영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스토커의 눈빛을 애써 외면했다.

그의 등 뒤에서 들어오는 거실의 불빛이 환했다. 환한 거실에는
자신이 어질어 놓은 유리조각이야 쓰레기 더미들이 쌓여 있어야 했었지만
좀 전부터 치우는 소리가 들렸기에 애써 모르는 척 무시를 했다.

이상한 스토커.

다가오세요. 이 이상은 다가오지 마세요.
내가 전하는 뜻이 무엇이 되었든 그 말에 순종적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편의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갔을 때였다.

하고 싶은 일도 할 일도 없었다. 배가 고팠지만 밥을 먹고 싶지 않았고,
고단했지만 눕고 싶지 않았다. 울고 싶지만 눈물이 말랐고, 소리치고 싶지만 목이 매였다.

불도 켜지 않은 방에 앉아 뜬눈으로 출근 시간까지를 보낸 일도 많았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무거운 마음이 자신의 갈 길을 막고 있다는 막연하면서도 치졸한 마음이 들었다.

이틀이나 씻지를 않은 몸에서 쉰내가 났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옷가지들을 대충 세탁기에 쑤셔 넣었다.
차가운 샤워기의 물이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기름기가
덕지해서 뭉텅이가 지는 머리카락에 흠뻑 물을 적셨다.

샤워를 마쳤을 때 욕실에 수건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젖은 몸은 한 체로 방에 불을 켜고 서랍장에서 수건을 하나 꺼내 들어
몸의 물기들을 떨궈냈다.

머리의 물기를 수건에 짜내는데 방의 풍경에 이질감이 들었다.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방을 골똘히 둘러보자, 책장 위에 놓인
작은 선인장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초점이 풀리고 다리의 힘이 빠져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다시 방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으나 다른 곳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여러 명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내게 오만 원 두 장을 내밀며 "이런 곳에서 일하지 말고, 나랑 놀자."라고 했던 아저씨
전화번호를 물어보고선 내가 고개를 흔들자 "씨발년."하고 욕을 하던 이름 모를 학생.
이따금 실수인 척 내 엉덩이를 만져오는 편의점의 사장, 얼마 전 술 마시고 편의점 물건을
집어던지던 대머리의 중년, 물건을 건네던 손을 변태처럼 더듬었던 아저씨.

그리고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담배 한 갑만 사가는 아저씨.

말 없는 선인장 화분을 들어 가만히 바라보았다.
솜털 같은 가시들이 일어선 모습이 귀엽고 앙증맞은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방에 들어왔을까, 누가 들어왔던 것일까.
앞으로도 또 찾아올 생각일까.

내가 집에 없을 때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내가 집에 있을 때도 들어올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한밤중 몰래 집에 찾아들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오싹한 기분이 들며 허리가 꼿꼿이 펴지는 느낌을 받았다.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할까, 망설였지만 집안에는 화분이 하나 더 생겼을 뿐, 다만 그뿐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점점 추락하던 마음의 한켠이 경직되는 기분을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범죄자의 침입에 그동안 잊고 있던 자극이란 것을 경험했다.
누군가 자신의 방에 머물렀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설렜다. 초라하고 꾸미지 않은
방안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미쳤다는 생각을 하며 방안에 메시지를 남겼다.

'신고하지 않을게요. 또 오세요.'

포스트잇 메모지를 현관에 붙이며 가슴이 방망이질을 쳤다.
일부러 방의 문에 열쇠를 채우지 않았다. 혹시나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이 오히려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토커는 주말이 아니고서는 집에 찾아드는 일은 없었다.
내가 적어 놓은 메시지들을 읽었다는 표시처럼 그가 방문한 날이면
메모지는 사라져있었다.

나는 방을 화사하게 꾸며갔다. 커튼의 색을 바꾸고 이불을 세탁했다.
허전한 방구석을 이리저리 보며 궁리를 했다. 시간이 지나며
이름 모를 방문객을 기다리는 방에는 활기가 생겨났다.

어렴풋 그려지던 스토커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그저 조용히 나의 방에 다녀가는 이상한 사람.

가끔씩 멀찌감치 서서는 편의점을 들여다보는 아저씨의 얼굴이 머리를 맴돌았다.
한참을 서 있다가는 조용히 담배 한 갑만을 사가는 아저씨.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애절한 마음이 생겨나는 자신이
이상스러우면서도 마음이 들떴다. 비로소 5년만에 자신이 다시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