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 1

상어 2012.06.22 11:28:07
웃긴대학 도토모리作


“댕, 댕, 댕, 댕, ….” 


괘종시계의 종소리가 자정을 알리고 있었다. 

어둠이 잔뜩 실려 있는 공허한 거실 내부엔 간헐적으로 울려퍼지는 시계 종소리만이 유일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덕구는 듣기 싫은 소음을 피해 이불을 뒤집어썼다. 

종소리는 느린 속도로 정확히 열두 번 그의 귀를 갈갈이 찢어놓더니 이윽고 요란한 소리를 멈추었다. 

열두번의 소리가 모두 울리자 그는 이불 속에서 빠끔히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비비며 방문을 열었다. 

황량한 느낌마저 감도는 거실 모퉁이엔 그의 아내가 들여 놓은 커다란 괘종시계가 요지부동의 자세로 우두커니 모습을 드리우고있었다. 



그는 잠옷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버릇처럼 베란다로 향하였다. 

베란다엔 화단에 심어 놓은 작은 아카시아 나무의 수수한 향이 물씬 베어있었다. 

감미로운 향을 음미하며 덕구는 베란다 너머로 휘황찬란하게 쏟아지는 달빛을 유유히 바라보며 잠시 사색에 잠겼다. 



“딩동!” 

베란다에서 나온 그가 주방으로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별안간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그는 흠칫 놀라며 현관을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누구지?’ 

인터폰 속에는 밝은 베이지색 야구 모자를 푹 눌러 쓴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누구시죠?” 

“소포 왔습니다.” 

‘소포?’ 덕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소포라니요?” 

“추석 연휴로 인하여 배달이 많이 지연될 수 있기 때문에, 일찍 주문하신 물품은 일정보다 미리 배송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내는 주구장창 중얼거렸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배달량이 많아서요. 그러다 보니 이렇게 늦은시간까지 배송이 지체되었습니다. 밤늦은 시간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잠을 설치던 차였는데.” 

덕구는 그렇게 말하고 얼른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 재꼈다. 



사내는 무거워 보이는 박스를 어깨에 이고 있었다. 

“여기, 주문하신 물품입니다.” 

그가 힘겹게 마룻바닥에 박스를 내려놓으며 말하였다. 

덕구는 의아한 얼굴로 박스를 들여다보았다. 

분명 요 근래에는 물품을 주문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또 쓸 데 없는 화장품이나 옷가지들을 주문한 것이라 생각했다. 



“춥죠?” 

덕구는 보은 통에 담긴 따듯한 커피 한잔을 사내에게 건내며 물었다. 

“일이 일인 만큼 정말 추위를 타는군요. 이제 겨울은 다 지났는데도 추위는 가실 줄 모르니….”

그는 따듯한 커피 잔에 손을 녹이며 말하였다. 

“밤늦게까지 고생하시네요. 저희 집이 마지막 배송인가요?” 

“그렇습니다.” 

사내가 커피로 몸을 녹이며 대답했다. 

순간 문득 덕구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번뜩이며 떠올랐다. 

그것은 영국으로 어학연수 갔을 때 구입한 고급양주였다. 

평소 그가 워낙 닳도록 애지중지 하던 것이라 그 자신도 몇 모금 맛을 보지 못한 술이었지만, 

유독 찬장에 키핑해놓은 그 애물단지가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밤도 깊었는데, 돌아가는 길이 성치 않겠습니다. 들어와 조금 쉬었다 가시죠.” 

덕구는 조심히 입실을 권하였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죠. 술 좋아하십니까?” 

“좋아하다마다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잠도 안 오던 차에 이야기 친구라도 필요했는데 잘 됐습니다. 같이 술이나 마십시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고개를 꺾고 정중히 인사하며 사내가 집 안에 발을 들여 놓았다. 



덕구는 의자를 밟고 올라가 찬장 깊숙이 들여놓았던 양주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근데 저 택배 박스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덕구는 식탁 위에 양주잔을 세팅하며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가 황당하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걸 저한테 물으시다니요. 주문하신 선생이 더 잘 알 터인데.” 

사내의 말에 덕구가 가볍게 코웃음쳤다. 

“아뇨. 저는 물품을 주문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아니라면 제 아내가 주문했겠죠. 또 쓸 데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군요.” 



사내는 박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덕구는 말없이 사내의 잔 한가득 양주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공손히 술을 받는 사내를 보고 덕구는 부드럽게 말하였다. 

“너무 어려워하지 마시고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계세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덕구가 건 낸 술을 기울였다. 

“근데 사모님은…?” 

사내는 원샷한 양주가 독한 지 미간을 찌푸리며 덕구에게 물었다. 

“아, 오늘 동창회가 있다고 늦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아, 예.” 

“근데 그건 왜 물으시는지?” 

“아니, 선생께서는 아까 사모님이 저 박스를 주문했다고 하시지않으셨습니까? 

제가 이곳에 있는게 사모님께 커다란 민폐가 되는게 아닌가해서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이렇게 밤늦은 시간에 저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불청객이잖습니까?” 

“그런 걱정이라면 안 해도 됩니다. 아내는 내일 오후에나 들어올 것이니.” 

덕구는 가볍게 웃으며 술잔을 들이켰다. 

박스를 바라보던 사내는 한시름 걱정을 놓으며 덕구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렇군요. 헌데 선생께서는 어떠한 직종에 몸을 담고 계십니까?” 

그렇게 묻고 그는 말없이 덕구의 빈 술잔을 채웠다. 

“하하!” 

사내의 물음에 너털 웃음을 지으며 덕구는 쑥쓰러운 듯 먼 산을 바라보았다. 



“제 작년까지는 프리랜서 작가로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출판사와의 계약이 해지되면서 손을 놓고 말았죠. 

그 이후로는 이렇게 만년 백수처럼 놀고 먹고 있습니다. 하하하!” 

그리고는 큰 소리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무표정한 사내의 얼굴이 그를 더욱 머쓱하게 만들었다. 

한참을 혼자 웃던 덕구는 무안한지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주가 떨어졌네요. 땅콩 좋아하십니까?” 

그는 주전부리를 찾기 위해 주방으로 향하였다. 

“아, 전 괜찮습니다.” 

손사래를 치며 덕구의 사려를 극구 거부하던 사내는 

“집을 좀 둘러봐도 괜찮겠습니까?” 라는 말을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조근조근 발걸음을 옮기며 어딘가로 향하였다. 

다름 아닌 어둠이 자욱이 깔린 거실이었다. 

덕구는 불쾌한 심정을 애써 감추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 저곳을 누비던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커다란 괘종시계 앞이었다. 

그가 시계를 어루만지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대 주택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괘종시계네요.” 

주방에서 안주거리를 찾던 덕구는 사내의 말에 짐짓 밝게 웃으며 대꾸하였다. 

“아내가 구입한 건데 아주 애물단지랍니다. 저것 때문에 요새 잠을 제대로 못들죠. 아주 미치겠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사내는 시계를 어루만지면서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안경을 고쳐쓰기 시작했다.

“괜찮으시다면, 선생이 쓰셨던 소설이 어떤 부류인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덕구는 한 줌 가득히 들고 있던 땅콩을 그릇에 담으며 무성의하게되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요?” 

“그냥 궁금해서요.” 

“궁금하십니까? 그걸 들으신다면 저를 싸이코라 생각할 게 분명한데두요.” 

“천만에요. 말씀해보세요.” 

“정 원하신다면….” 몇 번의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는 입을 열었다.

“저는 공포소설을 즐겨 씁니다만은, 혼령이나 귀신 혹은 사후세계같은 미지의 세계를 다루지는 않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게 소설이라는 것에는 부정할 수 없지만요. 

저는 언제까지나 비현실적인 요소를 최소한으로 배제하고 최대한 사실에 입각하여 글을 씁니다. 

그런 유령이나 귀신 목격담등 다소 비현실적이고 식상할 수 있는 부분들은 현대공포와는 거리가 멀죠.” 

“그렇다면 선생께서 다루는 분야는 어떤 것들입니까?” 

“음, 그렇다고 과학적으로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나 특정 대상에 대해서 쓴다고 하면 그건 설명문이나 논설문에 그치겠죠. 

소설이 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요소란 바로 허구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하하! 죄송합니다. 말이 너무 어려웠나요?” 

덕구는 신이 난 듯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소설의 기초 요소인 허구라는 개념을 배제하지 않은 채 최대한 사실에 입각하여 쓰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상적인 공포에 대해서 쓰곤 했습니다. 

인간내면에 숨겨져 있는 공포라던지, 두려움, 잔인성과 같은 것들요.” 

“그렇다면 그런 글들의 소재는 어디서 찾는지요?” 

“소재요?” 

“그렇습니다.” 

“음, 아무래도 소설의 컨셉이 일상적인 공포이니 만큼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찾겠죠?” 

“예를 들면요?” 

“흐음, 글쎄요. 저는 대게 생각을 많이 이용하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가끔씩 떠오르는 것이 있어요. 

지금 생각하고 있는 주제도 인간의 잔인성에 대한 플롯입니다.” 



사내는 눈에 힘을 주고 덕구의 말을 사뭇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는 답답해 보이는 모자를 벗어 재꼈다. 

그리고는 주방으로 돌아와 식탁에 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 

“네?” 

“그럼 지금 상황을 놓고 당장 그 소재를 찾으라면 찾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요?” 

“네.” 

“글쎄요. 그게 그렇게 쉽게 찾고, 쉽게 글을 쓴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사내는 모자에 눌린 머리를 위로 쓸어 넘기며 말하였다. 

“저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게 무슨……?” 

“들었던 그대로입니다. 저는 지금 이 상황에서 공포 소설에 필요한 소재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하!” 

덕구가 박장대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덧붙였다. 

“그럼 저랑 내기 하나 하시겠습니까?” 

“무슨 내기 말입니까?” 

“한 사람씩 차례대로 지금 이 상황에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상상하여 소재를 만드는 것입니다. 주제는 ‘공포’입니다. 

소재가 먼저 떨어지는 사람이 지는 룰로 말입니다. 만약 제가 진다면 선생이 원하는 것을 드리지요.” 

“원하는 것?” 

덕구가 의아한 얼굴로 들었던 술잔을 놓았다. 

“재밌군요.” 

그러고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남아 있는 술을 목으로 털어넣었다.

“좋아요. 헌데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내가 진다면?” 

“만약 선생이 진다면 저는 선생에게서 소중한 것 하나를 앗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선생은 절대적으로 저에게 그것을 주셔야 합니다.” 

“뭐요? 그럼 내가 주기를 거부한다면요?” 

“선생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마 내기가 끝나는 순간 저는 자연스럽게 선생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고 난 뒤일테니까요.” 

사내가 씨익 웃어보였다. 

“왜, 글이라는 것은 생전 써 본적도 없는 저에게 지기라도 할 것 같습니까?” 

“하하!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리입니까? 좋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다른 말 하기 없기입니다.”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알겠죠. 그럼 순서를 정하도록 하죠.” 

“먼저하시죠.” 

“후훗” 

사내의 얼굴에서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잘 들으십쇼.” 

“말해보세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사실일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 얘기가 저 혼자만의 줏대라고 믿든 그렇지 않다고 믿든 어느 것이든 당신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해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규칙입니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거죠?” 

“저기를 보십시오. 저 괘종시계 보이십니까?” 

사내는 거실 한 가운데 놓인 괘종시계를 가리키며 낮은 톤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아까 집안을 둘러보다 저 괘종시계 안에서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아주 작고 나즈막한 소리. 저는 분명히 두 귀로 들었습니다.” 

사내는 잠시 말을 멈추고 탁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키며 마른 성대를 축였다. 

덕구는 남자의 이어지는 말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저는 확신 하였습니다.” 

“………?” 

“저 안에 사람이 들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