껌 4
Yeul
2011.07.10 22:26:59
덩어리에서 손을 떼자 손에 닿았던 일부분이 마치 치즈처럼 쭉 늘어졌다.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봤다.
별 다른 향기가 느껴지진 않는다.
손에 붙은 잔해를 대충 털어내고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다.
불쾌한 찐득거림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았다.
마치 단물이 덜 빠진 씹다만 껌을 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몇 걸음 안 돼서 2층으로 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핸드폰을 좀 더 가까이 비추면서 천천히 한 계단씩 오른다.
그렇게 세 계단쯤 올랐을까.
-물컹.
이번엔 발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어떤 물컹한 것을 밟아 찌그러뜨린 느낌이 들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걸음을 떼려는데,
-찌이이익
신발 바닥으로부터 뭔가가 쭉 늘어지는 느낌이 난다.
혹시 이것도 방금 전의 그 덩어리랑 비슷한 것일까?
허리를 숙여 발 가까이 핸드폰을 데 보았다.
“윽!”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아까와 모양새는 비슷했지만 색이 달랐다.
하얀 덩어리가 아니라 시뻘건 덩어리였다.
물컹한 느낌이 없었다면 응고된 피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신발 바닥에 늘러 붙은 잔해를 떼어내야 했지만, 차마 이번 것은 손 대고 싶지 않았다.
쓱쓱 땅바닥에 몇 번 발을 문지르고 다시 걸음을 움직였다.
혹시라도 비슷한 덩어리를 다시 밟을까 꼼꼼히 바닥을 비추며 걸었다.
효과적이었다.
계단을 오를수록 덩어리의 분포가 많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뻘건 덩어리, 흰 덩어리, 거기에 구불구불하고 긴 덩어리도 있었다.
어두운 덕에 낱개로 이것들을 보고 있었지만,
불을 켜놓고 한 눈에 본다면 결코 유쾌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모두 오르고,
3층으로 향하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 순간.
-투욱
뭔가가 가볍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2층 복도 어디쯤 같은데 도무지 어두워서 보이지가 않는다.
잠시 복도 쪽으로 핸드폰을 비춰 보았다.
“거기 누구 있어요?”
대답은 없었다.
나는 굳이 그것을 확인하러 복도를 걷고 싶지는 않았다.
느슨하게 걸어놓았던 옷 따위겠지 라고 생각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불을 안 키고 온 것이 조금은 후회 된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다행히도 덩어리들은 없었다.
그것들을 피하면서 걷는 수고로움이 없어지자 아까보다 두 배는 빨리 오르는 것 같았다.
대체 그 덩어리들은 뭐 길래 2층 계단에만 있던 걸까?
-쿠웅
3층에 오르자 이번엔 2층에서 들었던 소리보다 더 크고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랄 정도의 소리였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칠흑 같은 복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당연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소리가 들려온다.
-쓰윽, 쓰윽
무언가 복도에 끌리는 소리.
-쓰으윽, 쓰으윽
그리고 그 소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들고 있던 핸드폰을 비춰보면 그만이었지만 이상하게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왠지 그곳을 비추는 순간 엄청나게 후회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 탓이었다.
-쓰으윽, 쓰으으윽
소리는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다가왔다.
저절로 침이 꿀꺽 삼켜진다.
그리고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우당탕!
다급한 마음에 계단을 비추는 둥, 마는 둥 했더니 몇 계단도 못 오르고 걸려 넘어져버렸다.
계단에 부딪쳐 몸 곳곳에서 아픔이 느껴진다.
“으윽. 씨팔...”
욕을 중얼거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오르려는데 뭔가가 허전하다.
“어, 핸드폰?”
넘어지면서 핸드폰을 놓친 모양이었다.
황급히 고개를 움직였지만 어디에도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난간 사이로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3층 높이에서 떨어졌으니 아마도 온전하진 못하겠지.
그나저나 큰일이었다.
마치 장님이 된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상태로는 단 한 계단도 제대로 오르기가 힘들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바닥에 몸을 다시 엎드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손을 더듬어가며 계단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최대한 조심히 오르는데도 팔꿈치나 무릎을 모서리에 부딪쳤다.
그리고 그 때마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픔이 느껴졌다.
“씨팔. 불 좀 켜 놓으면 덧나나.”
절로 입에서 욕이 튀어나온다.
“씨팔. 김상무 개♡♡. 좆같은 새♡.”
이번엔 김상무 욕이 나왔다.
“씨팔. 오과장. 찐따 같은 새♡.”
생각나는 모두에게 욕을 하며 그렇게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마지막 계단이라고 느껴지는 곳에 손이 닿았을 때 몸을 약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순간,
-덥썩!
무언가가 발목을 잡았다.
잡았다기 보다는 휘감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콰당!
살짝 일으키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계단에 코를 박고 말았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큰 아픔이 느껴진다.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내려 잡힌 발쪽을 쳐다보았다.
물론 아무것도 보이진 않았다.
단지 어떤 것의 윤곽만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덩치가 큰 것 같았다.
붙잡힌 발에 힘을 주어 보았다.
“으읍...”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 발을 움직이지도 못 할 만큼 강하게 붙잡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 거린다.
좀처럼 이 상황에 대해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단지 질식할 것 같은 공포감만이 스멀스멀 생겨나고 있었다.
“후...우...후....우...”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뭔가 곤란한 상황에 빠진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불과 몇 계단 위로 불이 켜진 4층이 있었고, 그 곳에는 야근중인 사원들이 있다.
나는 심호흡을 몇 번 더하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오주임! 오주이임!”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한 번 배에 힘을 주었다.
“오. 주. 임!!”
방금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별다른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정도로 소리를 질렀으면 누군가 달려 나오는 게 정상 아닌가?
나는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기 위해 숨을 가득 마셨다.
그리고 정말 온 힘을 다 해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오. 주. 우우우아아악!!”
살면서 이렇게 큰 소리를 질렀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이렇게 무서웠던 적이 있었던가.
-쿵쾅 쿵쾅 쿵쾅
‘그것’이 엄청난 힘으로 내 발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는 계단 모서리에 온 몸이 부딪치는 것도 잊은 채, 순수한 공포감만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으아아악! 씨팔, 오주임! 으아아악!!”
-콰다당!
사정없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어느새 3층까지 되돌아와 버린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우쉬추우후휘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낸 소리인가?
-우쉬추우후휘히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끔찍한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입술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입 안에 있는 껌만이 나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것도 단물이 많이 빠져있다.
떨리는 손으로 자켓 주머니를 뒤적뒤적 거렸다.
-우쉬추우후후
‘그것’이 또 괴상한 소리를 냈다.
붙잡힌 발목에서 조금씩 통증이 생기는 걸로 보아 뭔가 다른 움직임이 있을 것 같다.
“퉤!”
비록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저항의 일환으로 씹던 껌을 ‘그것’에게 뱉었다.
그리고 방금 빼낸 껌을 입에 집어넣어 난폭하게 씹었다.
그런데,
-우쉬추우후우우히!
뭔가 아까보다 격한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발을 붙잡던 힘이 사라졌다.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일시적으로 풀려난 것은 확실하다.
다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모서리에 부딪히든 말든 미♡ 듯이 계단을 기어올랐다.
아마 온 몸이 멍투성이일지도 모른다.
간신히 계단 끝에 손을 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후우... 후우... 후우...”
4층!
4층에 올라왔다.
나는 잠시 계단 쪽을 내려 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의 윤곽조차도.
하지만 안심할 수 없는 마음이 들어 급하게 복도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사무실마다 켜진 불빛이 복도까지 밝히고 있었다.
절뚝거리며, 오주임이 있는 402호 사무실로 향했다.
우습게도 족발과, 보쌈이 든 비닐봉지는 무사히 내 손목에 걸려 있었다.
걸어가면서 401호를 힐끗 쳐다보았다.
사람이 있었다면, 소리를 질렀을 때 나와 보는 것이 정상이다.
생각해보니 401호는 입사 동기인 천대리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문 앞을 천천히 지나며 내부를 살폈다.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딱히 기척이 느껴지진 않았다.
아마도 비어있는 모양이었다.
뭐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대부분이 퇴근하고, 남은 직원이라 봐야 한 사무실에 두 명에서 세 명 정도뿐일 것이었다.
적게는 한 명인 곳도 있을 것이고.
전체를 둘러보라는 임무를 맏고 오긴 했지만,
어차피 나는 일게 대리에 불과했고, 그럴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우선 핸드폰을 저 어둠너머로 분실했다.
게다가 3층에서는 습격을 당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지금 내 입에 있는 껌이 마지막 껌이라는 점이다.
그런 연유로 401호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내 발은 급격히 빨라졌다.
사무실간의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순식간에 402호 문 앞으로 다다랐다.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잠시 계단 쪽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지옥의 경계선이라도 되는 양 계단이 있는 복도 끝은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다.
금방이라도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다.
나는 점점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어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손에 힘을 주었다.
-끼이이익
거슬리는 낡은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휘이이이잉
제일먼저 나를 맞은 것은 맞바람이었다.
춘천의 싸늘한 밤공기가 몸을 훑자 나도 모르게 몸을 감싸며 추위에 반응을 한다.
정면으로 보이는 창문이 반 쯤 열려져 있던 게 원인인 것 같다.
난로를 켜 놔도 모자랄 날씨에 창문을 열어 놓다니 정말 생각이 있는 건가?
“오주임! 오주임!”
그 자리에 서서 오주임을 불렀다.
하지만 대답은 없다.
아무래도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쓰윽 주위를 둘러보았다.
싸늘한 공기 외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우선 창문을 닫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문을 닫은 후에는 히터도 틀 생각이었다.
걸으면서 슬쩍 책상들을 살펴보았다.
“이건 뭐 개판이구만...”
절로 이런 말이 나왔다.
책상들은 하나같이 아수라장이었다.
중요한 서류들은 죄다 땅에 내팽개쳐져 있었고, 필기구들과 이면지 따위가 지저분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당장 부도가 나도 이것보단 나을 지경이었다.
나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차며 앞으로 걷다가 오주임 책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질러진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면지에 크게 적어놓은 글귀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큼직하게 써 놓긴 했지만 휘갈겨 쓴 글씨라 멀리서는 식별이 힘들었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허리를 굽혔다.
[김대리 개♡♡. 저주할거다.]
내 욕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자리에 서서 오주임 책상 위를 뒤적거려보니 글귀가 적힌 종이 세 장을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손에 쥐고 한 장씩 읽어 내려간다.
[껌을 씹고 싶다. 정말 이대로 있다간 죽을 것 같다.]
[깨달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것 같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나가는 일만 남았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알 수 없는 말들이었다.
대체 뭘 깨닫고, 어떤 준비가 끝났다는 것일까?
“이 새♡, 혹시 여기 없는건가...”
마지막 글귀가 마음에 걸렸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나가는 일만 남았다.]
-끼이이익, 탁
창문을 닫으니 웅웅거리던 바람소리가 가셨다.
손목에 걸고 있던 봉지를 아무 책상에나 던져 놓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천히 둘러보니 훨씬 더 난장판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조금씩 납득이 안 가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출장을 마치고 올라와야 할 사람들이 사무실을 이렇게 개판으로 만들고 어딘가로 사라졌다니.
왠지 이 건물에 나 밖에 없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자,
참을 수 없는 공포감이 또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마침 신경이 곤두선 내 귓가에 희미한 소리가 잡혔다.
-쿵.
온 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불현듯 이 건물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쿠웅.
좀 더 명확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3층에서 들었던 그 소리가 분명하다.
나는 미♡듯이 책상들의 서랍을 열어 보기 시작했다.
오주임의 책상, 이주임의 책상, 그리고 양주임의 책상.
“차, 찾았다!”
양주임 책상 두 번째 서랍에서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그것은 손전등이었다.
오른 손으로 손전등을 잡고, 왼 손으로 이주임의 서랍에 있던 대형 콤파스를 들었다.
-쿠웅.
소리로 미루어보아 아직 사무실 앞까지 오진 못한 것 같았다.
당장 문을 열고 왼쪽 계단 쪽으로 뛰어간다면 탈출할 수 있을 것 같다.
-벌컥!
문을 열었다.
그리고 미♡듯이 뛰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씨... 씨팔...”
왼쪽 계단을 통해서도 뭔가의 그림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림자로 봐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존재였다.
어쩔 수 없이 황급히 뒤로 몸을 돌렸다.
-스르륵, 쿵
하지만 나는 더욱더 멈춰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미 401호 앞 까지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쉬우후우취우
‘그것’이 또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나 또한 ‘그것’에게 소리를 냈다.
“야... 양주임!?”
‘그것’은 바로 양주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양주임의 얼굴이 ‘그것’에 붙어 있었다.
몸 전체가 헐렁한 옷처럼 바닥으로 축 쳐져 있었고, 팔이나 다리가 제멋대로 뒤틀려서 붙어있었다.
그리고 몹시 덩치가 크다.
양주임의 덩치가 원래 컸다고 해도 이건 그보다 두 배 이상은 커 보였다.
거기에 손과 발의 갯수도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눈에 보이는 손만 네 개였는데 붙어 있는 위치도 제 각각이었다.
-우쉬우우후위우
또 한 번 괴상한 소리를 낸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슴팍에 붙어있는 양주임의 얼굴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왼쪽 옆구리쯤에 붙어있는 이주임의 얼굴에서 나온 소리였다.
“으, 으, 으아아아악!”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양주임과 이주임의 얼굴을 가진 ‘그것’은 아랑곳 않고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리가 풀려서 이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스르륵 쿵
‘그것’이 발을 움직일 때마다 축 쳐진 몸이 바닥을 ‘스르륵’하고 쓸었다.
나는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면서 뒤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어둠의 경계를 넘어 살짝 보이는 ‘또 다른 그것’의 일부분이 보인다.
이대로 주저앉고 싶다.
이 괴생물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스르륵 쿵
뒷걸음으로 어느덧 403호 앞까지 왔다.
하지만 무의미한 걸음이었다.
나는 그저 협살 당하는 주자에 불과했다.
저것들에게 붙잡히면 대체 무슨 일을 당하게 될까?
극에 달한 공포가 점점 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아빠. 치킨 사 올거지~?’
그러던 중,
문득 은비의 목소리가 생각난다.
그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동시에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불 타 오르기 시작했다.
“누, 누구 없어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손전등을 입에 물고 403호 문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덜컥, 덜컥
잠겨있었다.
나는 앞을 향해 콤파스를 휘두르며 계속해서 문을 흔들었다.
“읍! 으읍!! 으으으읍!”
입에 물고 있는 손전등 덕분에 명쾌한 소리를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거친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제발 누가 있어줘야 한다.
제발.
-스르륵, 쿠웅.
하지만 어느새 ‘그것’은 내가 휘두르는 콤파스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커다란 건축 설계용 콤파스도 이 괴물 앞에서는 초라해 보이기만 했다.
“씨, 씨팔. 꺼져 꺼지라고!!”
소리를 내자 입에 물고 있던 손전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떨리는 왼손을 더욱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다가오던 ‘그것’ 아니 괴물의 움직임이 조금은 멈칫하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듯 그 움직임을 계속한다.
-스르륵, 푸우욱. 쿵
콤파스가 보기 좋게 괴물의 배를 찔렀다.
하지만 왠지 느낌이 이상하다.
콤파스를 빼려고 손을 당기자 엉겨 붙은 살이 쭈욱 하고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껌처럼.
“아, 아, 아아아아악 씨팔!!”
-투욱!
엉겨 붙은 살 때문에 더 이상 콤파스를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제 모든 게 끝이다.
가까이 다가온 양주임의 얼굴에서 왠지 희미한 미소가 보이는 것 같았다.
“으, 은비야. 미안해. 미안해.”
-철컥!
죽음 앞에서 환청이라도 들은 건가?
“#$#@@#$@세요!!”
무슨 소리가 들려온다.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어서 들어오세요! 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소리는 403호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손잡이를 잡은 손에 다시 힘을 넣었다.
-벌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우이쉬휘위추휘
괴물의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시간이 없다.
몸을 던져서라도 들어가야 한다.
-콰악
“으아아악.”
하지만 보기 좋게 괴물에게 발을 붙잡히고 말았다.
고개를 내려 보니 다리춤에 붙어 있던 손이 뻗어져 나와, 기괴한 모양으로 내 발목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아마 엄청난 힘으로 나를 끌고 갈 것이 뻔했다.
“껌, 그 씹고 있는 껌을 뱉어요!”
403호의 사람이 소리쳤다.
“퉤!”
나는 이유도 모른 채 거의 조건반사 식으로 껌을 뱉어버렸다.
입에서 나온 껌이 포물선을 그리며 괴물의 바로 옆으로 떨어졌다.
그 때였다.
갑자기 양주임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몹시 흥분한 표정이랄까.
-우쉬이위우취이추이!!!
그리고는 3층에서처럼 격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발목을 감고 있던 손도 풀어져 있었다.
“어서 들어와요! 어서!”
나는 이번에야 말로 몸을 날렸다.
-쿠당탕!
몸이 바닥에 부딪치면서 둔탁한 소리를 낸다.
하지만 아픈 줄도 모르고 급하게 몸을 추슬렀다.
“저, 저것들은 대체 뭐요!”
“일단! 문부터 잠그죠. 문 좀 잡아주세요.”
나는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허겁지겁 문을 붙잡았다.
그러자 그가 까치발을 들고 문 위로 손을 올렸다.
“문이 움직이지 않게 잘 잡아 주세요.”
투명한 문 앞으로 그 괴물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내가 뱉은 껌 쪽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서 그런지, 이쪽에는 등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에겐 고역이었다.
왜냐하면 그 등에도 얼굴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씨, 씨♡. 천대리 아니야.”
당장이라도 이 손을 놓고 싶었다.
괴물의 등짝에 달려있는 동기의 얼굴을 보는 것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더군다나 그 특유의 부리부리한 눈으로 계속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빠, 빨리 잠가요. 더 이상 못 견디겠어!”
“자꾸 손을 떠니까 균형이 안 맞잖아요. 잘 좀 잡아 봐요!”
짜증 섞인 말투였다.
하지만 몸이 떨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용할 정도였으니까.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최대한 집중해서 손잡이를 꽉 잡았다.
-우쉬추우후후
괴물의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나를 노려보던 천대리의 얼굴에서 나온 소리였다.
예상이 맞는다면 이제 내 쪽으로 관심을 돌릴게 분명하다.
-스르륵, 스르륵
그리고 예상대로,
괴물이 굽히고 있던 몸을 펴서 조금씩 내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씨, 씨파알.”
떨면 안 된다.
떨면 안 된다.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지고, 굵은 식은땀이 발밑으로 떨어진다.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