껌 6
Yeul
2011.07.10 22:53:39
-여보세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늘 그렇듯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은비를 혼낼 때는 조금 날카로워 지지만 말이다.
“후우...”
아내의 목소리에 마음이 놓인 탓인지,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아내가 재차 물었다.
처음 보는 번호인데 걸자마자 한숨부터 쉬어서 그런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나야.”
짧게 한 마디 했다.
-어? 자기야?
단번에 알아챘지만 역시 의아해 하는 목소리였다.
“어. 은비는 자?”
-아니 아직. 음음. 이 번호는 뭐야? 음음.
밥이라도 먹고 있는 걸까.
손목을 올려 시계를 봤다.
열시 이십 분.
저녁을 먹기에는 늦은 시각이었다.
“아아. 후배직원 전화야. 내 게 지금 고장 났거든.”
-음음. 음음. 아휴 어쩌다가. 그런데 밥은 음음 먹었어?
“어. 뭐 대충. 그건 그렇고, 오늘 못 들어갈 것 같아.”
-왜? 음음 많이 바빠? 음음 은비가 자기 때문에 안자고 있는데. 음음.
“자세한 건 들어가서 말할게. 은비 어서 자라 그래.”
-음음. 음음.
아까부터 우물거리는 소리가 계속 거슬린다.
대체 뭘 먹길래.
“대체 입안에 뭐야? 통화할 때는 삼키든지, 뱉든지 하라고.”
-음음. 아아. 알았어. 잠깐만. 음음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꿀꺽’하는 소리가 들린다.
삼킨 모양이었다.
“뭘 먹은거야?”
-아. 별 거 아니야.
“뭔데? 맛있는 거면 나도 내일 해줘.”
-후후. 은비 바꿔줄게~
‘은비야 아빠야~’ 하는 아내의 소리와,
‘어 정말?’ 하는 은비의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우당탕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빠!!
은비였다.
방심하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자 나를 지켜보고 있던 필중이 말했다.
“집에 무슨 일 있어요? 갑자기 왜 그렇게 놀라요?”
“아, 아냐. 그냥 딸내미가 소리를 좀 질러서 흐흐흐.”
어색하게 웃어주고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그래 아빠야. 깜짝 놀랐잖니.”
-아빠! 아빠! 음음. 오늘 음음. 왜 안 와~?
“아빠가 오늘 너무 바빠서 그래. 내일 일찍 갈게.”
-아아아아~ 치킨 치킨~ 음음. 치킨~
“은비 너~ 아빠보다 치킨이 더 보고 싶구나.”
은비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냐. 아빠가 훨씬 보고 싶어. 음음
가만히 듣고 있으니 은비도 뭔가를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은비야. 그런데 지금 엄마랑 뭐 먹고 있었니?”
-응~ 음음 나 지금 껌 먹어~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껌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이 반응을 하는 모양이다.
“어, 어 그래. 은비야. 아빠가 며칠 전에 사준 치약껌이니?”
-아냐 그거~ 음음 엄마가 대빵 맛있는 껌 줬어~
갑자기 서늘한 기분이 든다.
“치,치약껌이 아니면 무슨 껌이야?”
-우웅~ 치약껌보다 음음. 훨씬 훨씬 음음. 백만배 달아 히히
치약껌보다 달다니.
살면서 수많은 껌을 씹어봤지만 어린이용 치약껌 이상 단 껌은 맛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단 껌을 찾기 힘들 거고.
그 껌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 껌.
그 껌?
순간 어제 잃어버렸던 껌 두 개가 떠오른다.
“은비야! 그 껌 어디서 낫니!”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은비가 깜짝 놀랐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아~ 깜짝 놀랐잖아! 아빠 바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했다.
안 좋은 쪽으로 일부러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시중에 파는 껌일 것이다.
어쩌면 껌처럼 생긴 츄잉캔디일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진정 되는 것 같았다.
“미안해 은비야~ 그런데 엄마가 무슨 껌을 줬어~?”
-아빠랑 말 안 해 흥!
“은비야~ 아빠가 내일 치킨 두 마리 사갈게~ 교촌하고 비비큐. 어때?”
-저엉말?
“그럼~ 아빠가 언제 거짓말 하는 거 봤어?”
-와아아아! 음음. 아빠 내일 꼭 와야 해! 음음. 꼭이야 꼭!
치킨 두 마리에 겨우 은비의 마음을 풀 수 있었다.
“그럼 아까 아빠가 물어본 거 대답해줘야지~”
-응? 아아 껌 뭐냐구?
“그래. 엄마가 무슨 껌을 줬어?”
-음~
잠시 은비가 말을 멈추었다.
기억을 떠올리려는 모양이다.
우물거리는 소리만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대리님. 너무 오래 쓰시는 거 아니에요~”
필중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필중을 향해 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수화기 멀리서 ‘엄마 이 껌 아빠가 준 거 맞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전에 사준 치약껌은 분명히 아니라고 했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사다준 껌이 있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니 반드시 생각해내야만 한다.
잠시 후,
‘어 맞어.’ 하는 아내의 소리와 함께 다시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이거 엄마가 세상에서 두 개 밖에 없는 껌이라고 했었어.
“응? 은비야 그게 무슨 말이야?”
-아빠가 우리 주려고 세상에 두 개 밖에 없는 껌을 사왔다고 했어.
“아빠가?”
-응 아빠가 음음.
“대리님. 왜 그러세요. 껌 뱉으셨어요? 표정이 왜 그렇게...”
내 표정을 보던 필중이 말했다.
내가 내 얼굴을 볼 순 없지만 아마 처참하게 일그러진 것이 분명하다.
겨우 진정시킨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두 배는 더 맹렬히 뛰는 것 같았다.
“으, 은비야. 호, 혹시. 그, 그, 그거 아빠 주, 주머니에 있던 거냐고 어, 엄마한테 물어봐”
입이 덜덜 떨린다.
-으응 알았어~ 엄마~!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리고 입술은 바짝 마른다.
혓바닥으로 연신 입술을 축이지만, 임시 처방일 뿐 순식간에 다시 말라버린다.
잠시 후 은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여전히 천진난만한 목소리였다.
“으, 응. 으, 은비야. 뭐, 뭐래?”
-응. 맞대. 음음
“......”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대리님? 대리님?”
필중의 소리가 마치 스테레오처럼 울려서 들린다.
이미 정상적인 사고회로가 어긋난 모양이다.
-아빠! 아빠!
하지만 은비의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은비야. 은비야. 아빠 말 잘 들어. 은비야. 은비야.”
-알았어 아빠. 음음. 왜 똑같은 말 해. 음음.
“하아. 하아."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은비야. 후욱. 지금 씹고 있는 껌. 절대로 삼키면 안 돼. 알았지?”
-응? 왜에. 음음. 이 껌 너무 맛있어서 이제 삼키려구 했는데. 음음
절대 이 껌을 삼켜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어떻게 삼키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겨우 여덟살짜리한테 그런 인내심을 바랄 수 있을까?
“이건 아빠랑 게임하는 거야.”
-응? 무슨 게임~?
절대 삼키지 않게 해야 한다.
절대 삼키지 않게 해야 한다.
“아, 아빠가 올 때까지 은비가 껌을 계속 씹고 있으면. 아빠가, 아빠가 똑같은 껌을 또 줄게!”
일단 되는대로 말 해 버렸다.
-어? 정말? 세상에서 두 개 밖에 없는 거 아니었어?
은비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혀 우물쭈물 하며 말이 나왔다.
“아, 그, 아, 뭐. 아, 아냐. 은비야. 이건 그 껌보다 더 맛있는, 세상에서 하나 뿐인 껌이야~”
그래도 겨우 임기응변은 해냈다.
-흐음~
잠깐 뜸을 들을 들이더니,
-알았어 아빠. 나 안 삼킬게.
은비가 말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큰 한숨이 나와 버렸다.
“은비야. 꼭이야. 아빠랑 게임하는 거니까. 꼭 지켜야 해. 알았지? 약속~”
-응응 알았어.
“은비야. 그럼 이제 엄마 좀 바꿔줄래?”
은비보다 아내가 더 문제였다.
아까 전에 분명히.
분명히.
분명히, 삼켰다.
-여보세요?
“너, 너!! 아까 삼킨 거 뭐야. 뭐냐고!”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내 예상이 맞다면,
내 예상이 확실하다면.
“뭐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은비한테 안 들었어?
문에 몸을 비비고 있는 괴물의 모습이 보인다.
처참하게 찌그러진 몸뚱이에 세 사람의 얼굴이 붙어 있다.
팔과 다리는 아무렇게나 붙어서 너덜거리고 있고, 괴상한 소리를 연신 내뱉고 있다.
저 들도 이틀 전에는 사람이었다.
껌을 삼키기 전에는 말이다.
“야 너! 니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어!?”
-응?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껌 삼킨 것 땜에 그러는 거야?
그래 맞아.
그런데 그냥 껌이 아니지.
삼키면, 괴물이 되는 껌이지.
“내 주머니서 뺐어? 확실히 그 껌 맞아?”
정신없이 큰 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자꾸. 무섭게. 그 껌이 그렇게 중요한 껌이었어?
확신이 확실로 바뀌고 있었다.
나는 거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되고 시작했다.
“야! 왜 남의 주머니에 손을 대! 너가 도둑이야?”
마음에도 없는 말이 막 나온다.
-대, 대체 왜 그래. 그 껌이 그렇게 아까워? 그 많은 것 중에 두 개가 그렇게 아까워?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가 따지기 시작했다.
미여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억지로 침을 한 번 삼킨 후 말을 꺼냈다.
“씨팔! 너 정말 삼켰니? 아 맞다. 토하면 되겠다. 자기야. 소금물 마셔. 어서 토하라고!”
-자기 정말 갑자기 왜 이래... 나 무서워. 무섭다고.
이미 껌을 삼킨 마당에 대체 무슨 말을 해 줘야 한단 말인가.
거기에 나 역시 괴물에게 습격당해 밀실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자기야.. 흑흑, 자기야.. 흐, 흐흑”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자, 기야... 나, 나 무서워. 왜 울고 그래...흐, 흐흑.
아내도 덩달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대리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필중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흐음, 흐음. 아, 아무것도 아니야. 끅, 흐음. 금방 끊을게. 미안하다 필중아.”
“그것 때문이 아니잖아요! 무슨 일이에요? 집에 무슨 일 생긴 거예요?”
참으려 해도 이 흐느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후배직원 앞에서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들썩이는 어깨를 억지로,
억지로 멈추고 필중을 향해 말을 꺼냈다.
“흐읍. 필중아. 나 마누라한테 딱 이십 초만 얘기하고 끊을 테니까. 잠깐만 떨어져 줄래?”
필중이 납득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뭔가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나는 필중이 충분히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다시 핸드폰 수화기에 입을 대었다.
“자기야.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하지? 학교 동아리에서 말이야. 흐읍. 그 때도 자기 좋다고 따라다니던
놈들 엄청 많았잖아. 흐읍.”
-그 얘기를 갑자기 왜, 왜 하냐고! 으아아앙.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게 울었었는데 기억나? 뉴스 보고 울었잖아. 흐읍. 우리랑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어린 아이가 죽었다고 그렇게 울었었잖아. 흐읍. 나 그 때 자기 참 푼수라고 생각했었어. 하하. 흐읍.”
-으아아앙!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흑흑.
“자기야, 아니 은영아. 내 말 잘 들어.”
-흑흑. 흐흐흑.
“지금부터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나만 믿고 견뎌야 해. 알았지?”
-흑흑, 흑흑흑
“어서 대답해! 알았지?”
-흑흑... 알았어.
“그래. 그래야 내 마누라지.”
-대체 무슨 일이냐고! 으아아앙!
나는 아무 말도 해줄 말이 없었다.
그리고 어떤 말도 해서는 안 됐다.
이 말만 빼고는.
“사랑해.”
-자기야, 자기...
전화기의 종료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 슬라이더를 거칠게 닫은 후, 물기어린 눈가를 오른 팔로 쓰윽 닦아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필중이 다가왔다.
“통화 다 끝나셨어요?”
굳은 표정으로 필중을 바라보았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
단호한 목소리로 필중에게 입을 열었다.
“여기서 나가자.”
나가야 한다.
무조건 나가야 한다.
방법 따위는 모르겠다.
하지만 죽는 한이 있어도 나가야 한다.
나가서 아내와 은비를 구해야 한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집에 무슨 일 있어요?"
"필중아."
"예?"
"나가자."
이 때 필중에게 비치는 내 모습이 어땠을까.
아마 갑자기 정신이라도 나간 것처럼 보였을 거다.
"다짜고짜 그렇게 말 하셔도, 대체 무슨 수로 여길 나가자는 거... 어? 대리님?"
필중이 계속 말했다
"우... 세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이 나온 모양이었다.
허겁지겁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우, 울긴 새끼야. 누가 울어."
"아까 통화중에도 우시는 거 봤어요. 무슨 일이에요? 뭐 삼켰느니, 어쨌느니 하시던 것 같던데."
필중의 말에 안으로부터 용솟음치는 감정이 느껴진다.
그리고 순간 울컥하나 싶더니, 이내 참을 수 없는 상태에 빠지고 만다.
"씨팔. 흐흑흑흑."
"이제 아예 대놓고 우시네. 참나..."
모르겠다.
아직 아내도, 은비도 어떻게 된 건 아닌데 왜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다.
"아내가, 아내가, 그 껌을 삼켰어."
"뭐라고요?"
"그리고 내 딸은 그 껌을 씹고 있고.. 크흑...씨팔. 그러니까, 나가야 한다고!"
은비를 떠올리니 또다시 감정이 격해졌다.
나는 도무지 그 아이가 괴물이 된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 아이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나는 것도, 그 아이의 얼굴이 이상한 곳에 붙어 있는 것도.
"아니, 아니 어쩌다가 그걸 씹었대요?"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그 껌을 가져오면 안 되는 거였어. 차라리 내가 삼켰으면 삼켰지. 왜 아무것도 모르
는 우리 가족이... 니미! 씨팔!"
흥분한 나에게 필중이 손을 내밀어 한 쪽 어깨를 붙잡았다.
"진정하세요. 마음은 알겠는데, 이성적으로 생각하자고요."
"흐흐흑..."
필중의 말이 맞았다.
우선은 이성을 찾아야 한다.
아내에게는 나만 믿으라고 해 놓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억지로 침을 삼켜가며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나를 필중이 물끄러미 보고 있었고, 어느 정도 뜸을 들인 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용케 나가서 집으로 갔다고 쳐요. 그 다음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무슨 해독제라도 있나요? 눈앞에서 부인
이 괴물로 변하는 걸 보고 싶으신 건 아니잖아요."
직설적이라 거슬리긴 했지만 틀린 말은 없었다.
당장 집에 간다고 아내를 구할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눈앞에서 괴물이 되기라도 한다면 그거야말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은비는 어쩌란 말인가.
은비까지 껌을 삼킨다면 나는 아마 미칠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충분히 정상은 아니었지만.
"후우. 그래 너 말이 맞다. 후우, 후우. 쪽팔리게 씨팔. 후우 후우."
숨을 골랐다.
이성을 찾는 데도 역시 은비 생각이 최고였다.
"후우. 후우. 아? 아. 그 집! 그 집으로 가 봐야겠어!"
"예? 무슨 집..."
"처음 이 껌을 받았던 곳 말이야. 그 집 주인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거야. 이 일의 장본인이니까."
필중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 사이 나도 여러 생각을 떠올렸다.
특히 그 음식점 주인의 모습,
분명히 팔 여기저기에 살점이 뜯겨져있었다.
잘은 몰라도 정황상 그 껌의 영향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필중의 말로 볼 때, 오주임도 그 주인과 비슷한 모습이 된 것 같았다.
그러니까 껌을 삼킨다고 해서 꼭 문 밖의 괴물처럼 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지금 상황에서는 팔에 구멍을 뚫는 상태라도 감지덕지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아내가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괴물로만은 절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일단은 그 가게로 가야한다.
그 주인장을 만나서 모든 비밀을 알아내야 한다.
“음... 다른 건 다 둘째 치고 일단 저 괴물은 어쩔 겁니까.”
생각을 마친 필중이 말했다.
조금은 누그러진 말투였다.
그나저나 정말 저 괴물이 문제이긴 했다.
문 앞을 딱 막고 서서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는 저 녀석을 어떻게 돌파한단 말인가.
“그, 약점 같은 거 없을까? 가령 불에 약하다든지.”
“약점이 있었으면 제가 여기 갇혀 있게요?”
“음.”
괴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때다.
다행히 흥분상태는 많이 가라앉았다.
여전히 가슴은 뛰고 있었지만.
“저 놈만이 문제가 아니에요. 3층에는 저런 녀석들이 득실득실 하다고요.”
“응? 득실득실?”
아까 전 좌측 통로에서 비치던 실루엣이 떠오른다.
괴물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껌을 삼킨 사람만 괴물이 되었다면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득실 득실이라니.
“우리가 4층으로 도망 온 이유가 그거에요. 저 녀석들은 3층을 거점으로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한 놈이었
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수가 많아지더라고요. 걷잡을 수 없을 지경이 되기 전에 사람들과 함께 나왔죠.
그때는 저렇게 문 앞을 떡하니 지키고 있지 않았거든요.”
“그럼 나온 김에 밖으로 나가지 그랬어.”
필중이 고개를 젓는다.
“이미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저 놈들이 지키고 있었어요. 어쩔 수 없이 4층으로 가게 됐는데, 3층과
는 달리 한 녀석만 그 곳을 배회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비교적 손 쉽게 우리는 405호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405로 들어간 이유는 내부가 크기도 했지만, 잠금장치가 2중이라 좀 더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어요.”
“잠깐만. 그런데 그 한 놈은 어떻게 피한거야?”
“예?”
“그러니까. 그 4층에 있던 한 마리의 괴물은 무슨 수로 피할 수 있었냐고.”
“아아.”
필중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마리쯤은 피할 수 있어요. 아까도 비슷했잖아요.”
그 말에 문득 떠올랐다.
괴물에게 잡혔을 때 빠져나왔던 순간이 말이다.
두 번이나 괴물에게 붙잡혔고, 그 때마다 내가 취한 행동은,
바로 껌을 뱉는 것이었다.
“껌을 뱉으면 괴물의 관심을 잠시 돌릴 수가 있어요. 일반껌이 아니라, 음 뭐라고 해야 하나, 오부장 껌?
이것으로 말이죠.”
굳이 오부장 껌만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처음에 내가 뱉은 껌은 오부장과는 전혀 연관이 없었으니까.
어쨌든 이건 긍정적인 정보였다.
필중이 우려했던 문 앞의 괴물을 돌파할 최적의 수단이 분명했다.
“그럼. 여기서 나갈 수 있겠네. 껌을 뱉으면 되잖아.”
필중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은 조금 달라요. 문에 찰싹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껌을 뱉기 위해 문을 여는 것 자체가 위험해요.”
“문을 열자마자 껌을 뱉으면 되잖아. 그게 뭐가 위험해?”
“잠금 쇠를 돌리면 저 괴물은 바로 들이닥칠 거예요. 행여 뱉기도 전에 얼굴을 붙잡히면 어떡할 거예요?”
“얼굴을 꼭 잡힌다는 보장은 없잖아. 그리고 껌을 뱉는 것은 순식간이야.”
“그것뿐이 아니에요. 용케 껌은 뱉었지만, 급하게 뱉느라 문 바로 앞에 떨어진다면 어떡할 거죠?”
가만 보니 얼마 안 되는 확률에 계속 연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기우쯤은 굳이 괴물이 없더라도 널려있는 게 현실이다.
“한 명이 잡히더라도 우린 둘이니까, 남은 한 명이 껌을 뱉으면 되잖아.”
“그...”
필중이 약간의 시간차를 주며 말을 했다.
“그 한 명은 누, 누가 할 건데요?”
“뭐? 무슨 한 명?”
“괴물에게 잡히는 사람 말이에요. 전 못해요. 저 괴물에게 절대 잡히고 싶지 않다고요.”
“괴물에게 잡히는 거, 내가 하면 되잖아.”
“하지만, 동시에 잡힐 수도 있죠.”
아무래도 필중은 여기서 나가는 것에 회의적인 모양이었다.
경찰도 불렀겠다,
괴물이 문을 열지도 못하겠다,
필중으로서는 아무리 확률 좋은 도박이라도 꺼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나는 나가야 한다.
언제 올지 모르는 경찰을 기다릴 수 없고, 온다고 해도 저 괴물을 대체 어떻게 상대할 건지가 의문이었다.
헛기침을 한 번하고 말을 이었다.
“그럼 나 혼자라도 나가겠어. 단, 한 가지 부탁만 들어줘.”
필중은 긍정도, 부정도 취하지 않았다.
“제 정신이에요? 혼자서 여길 어떻게 나가요.”
“그러니까 부탁 하나만 들어달라고 하잖아. 들어줄 거야, 말거야?”
필중이 노골적으로 내 눈을 피했다.
“뭐, 뭔지 말이나 해 보세요.”
“내가 괴물에게 잡히면, 늦게라도 좋으니까 껌을 뱉어줘.”
필중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무슨 말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보다 내가 먼저 말을 했다.
“알아. 동시에 잡힐 수 있는 위험 충분히 알아. 그러니까 내가 잡히는 걸 확실히 본 다음에라도 껌을 뱉어
달라고. 뒤늦게나마.”
“문은요? 문은 누가 열어요?”
“문도 내가 열께. 내가 열고, 내가 잡히면 되잖아. 넌 멀찌감치 보다가 내가 끌려가기 전에만 와서 껌을
뱉어달라고. 그리고 내가 빠져나가면 그 때 다시 문을 잠그면 되잖아.”
정말 최소한의 부탁이었다.
하지만 필중은 여전히 나의 눈을 피하며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
“아까 전에는 괴물 앞에서 문까지 열어 나를 구했잖아. 이제 와서 그렇게 두려워하는 이유가 뭐야?”
그러고 보니 그 때도 필중은 껌을 뱉어주지 않았다.
잡혀 있는 내게 껌을 뱉으라고 소리만 쳤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껌을 뱉는 것은, 그 행위로만 본다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닌데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어쩌면 뭔가 숨기는 것이라도 있는 것일까?
“말했잖아요. 눈앞에서 더 이상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그럼 말 다했네. 이번에도 내가 죽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을 것 아니야?”
“그, 그런.”
필중의 말을 듣기도 전에 이미 문 쪽으로 성큼성큼 가기 시작했다.
내게는 더 이상 필중을 설득할 시간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 그러지 말아요! 안 돼. 안 된다고. 이 껌은 뱉을 수 없어!”
필중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지 이 껌은 뱉을 수 없다는 말이 조금 신경 쓰일 뿐이었다.
“갑자기 그 장기자랑이 떠오르네. 필승 말이야, 정말 대단했었어.”
필중에게 농담을 한 마디 건 냈다.
그리고 문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 앞에 서자 괴물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자세가 되었다.
다시 봐도 끔찍한 모습.
특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양주임의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괴물은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며 반응하기 시작했다.
까치발을 들고, 손을 잠금쇠 위로 가져갔다.
그러자 뒤에서 필중의 소리가 들려온다.
“안 돼! 안된다고!”
-끼익, 철컥.
잠글 때는 그렇게 안 잠가졌으면서, 열 때는 얄미울 정도로 손쉽게 풀린다.
“필중아. 너만 믿는...”
-벌컥!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괴물이 들이닥친 것이다.
-콰악!!
그리고 껌을 뱉을새도 없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괴물에게 붙잡혔기 때문이다.
그것도 얼굴을.
“끄으으으으읍!!”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동안의 기다림으로 한이라도 서린 탓일까?
괴물이, 붙잡은 내 얼굴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우쉬치이추히우추”
괴물의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씨팔" 하고 욕을 내뱉는 필중의 소리도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