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마는 인간의 망상을 통해 고유한 형태를 얻게 된다.
어떤 문제든 영상을 반복적으로 소환하면 스케마가 강해지고 활기를 띠며 응축된다.
스케마는 힘이 강해지면 물질계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한다.
"내가 먹고 자라는 건 너의 흥분이야. 난 울화, 슬픔, 충격, 근심, 증오, 질투를 가장 좋아해."
율이가 말했다.
율이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막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당시 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 윤이는 서울말을 쓴다며 꽤나 따돌림을 받았고, 그래서 언제나 혼자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 소년이 찾아왔다.
―안녕? 내 이름은 율이야.
율이는 친구가 되어주었다.
밥도 같이 먹었고 숙제도 함께 하였으며 훌륭한 놀이상대가 되어주었다.
윤이가 바라는 모든것은 이루어졌다.
'그런데 율이 넌 몇 반이야?'
웃으며 서있는 율이의 뒤로 아이들이 공을 차며 스쳐지나갔다.
그 누구도 율이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수업을 듣길 강요하지 않았다.
율이가 하는 것이라곤 그저 언제나 혼자인 윤이의 옆에 앉아, 연필을 돌리거나 휘파람을 부는 것이었다. 마치 율이 혼자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런거 없어.
율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잘 들어, 난 그저 네게만 보일 뿐이라구. 딴 사람들에겐 말하지 않는게 좋을걸.
그렇지 않아도 넌 음침한 아이라 다들 피하고 있잖아?
율이는 그저 윤이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아니,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시간이 흐르고 윤이가 커감에 따라 율이 역시 키가 크고 어깨가 넓어졌다.
어느날은 면도를 하겠다며 욕실 안에서 한참동안 나오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변화는 율이에게 힘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윤이의 친구가 되어주었던 과거와는 달랐다.
율이는 윤이의 주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윤이가 싫어하는 것은 그도 싫어했고, 윤이가 좋아하는 것은 그러나 역시 싫어했다.
율이는 모든 것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봐, 한심하지 않니? 몇 년 전부터 살을 빼야겠단 소리만 반복하고 있어.
그런 주제에 오늘도 야식을 먹어대는군.
차라리 살 빼겠단 선언이나 하지 말 것이지.
분명 내일이면 이렇게 말하겠지?
내가 미쳤었지, 하지만 이번엔 정말 다이어트 할거라구! 엄마, 이제부터 나 밥 안먹을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율이가 윤이의 누나를 가리키며 낄낄 웃었다.
그녀의 높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따라하는 것 역시 잊지않았다.
"그렇게 말하지마. 누난 나름대로 스트레스 받고있단 말이야. 좋아하는 선배가 생겼는데 뚱뚱한 여잘 싫어한대."
―그럼 쳐먹질 말아야지.
신랄하게 말하며 율이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팠다.
"됐어. 너랑 무슨 말을 하겠어. 난 공부나 할거야. 따라와서 귀찮게 하지마."
한숨을 내쉰 윤이는 율이를 밀치고 방으로 향했다.
율이는 그런 그의 뒤를 따라오며 끊임없이 지껄였다.
―나랑 무슨 말을 하겠냐니? 말이 심한거 아냐?
잊지말라구, 넌 요만한 꼬꼬마때부터 지금까지 나랑 제일 많이 얘기했다는걸!
외롭다며 찡찡거리는 꼬마랑 놀아줬더니 이런소리나 하고 말이야. 배신이야.
시끄럽고 귀찮아 윤이는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자 복어같은 표정을 지은 율이가 그의 뒤에 바짝붙어 귓가에 고함을 질렀다.
"악! 무슨 짓이야!"
―그러길래 왜 내 말을 무시해, 무시하긴.
이런걸 왜 해? 따분하지 않니? 그냥 나랑 놀자.
하루쯤 공부 안 한다고 죽냐. 게임 한 판만 하자. 응? 혼자선 재미없단 말이야.
율이는 윤이의 책상에 널려있는 문제집을 마치 더러운 것을 만지듯 검지와 엄지로 들어올려보였다.
"바보야 일주일 후가 시험이란 말이야!"
―그깟거 좀 못 친다고 죽냐? 공부 좀 못하면 어때. 어떻게든 살아지는게 사람인데.
아아, 혹시 엄마 잔소리때문에 그러는거야?
그거야 집을 잠깐 나가있으면 되잖아?
짧으면 일주일, 못해도 이주일 정도 얼굴을 안 비추면 제발 돌아만 와달라고 울고불고 빌걸.
말문이 막힌 윤이는 경멸스런 얼굴로 율이를 바라보았다.
"넌…… 정말 악마야."
―거짓말하지마. 넌 어렸을때부터 지금까지 거짓말만 하고있어. 거짓말쟁이.
"그게 무슨소리야!"
율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듯, 율이는 그저 윤이의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을 뿐이었다. 평소때라면 이렇게 이불이라는 유형의 막으로 대화를 차단하는 율이를 참아 넘겼겠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윤이는 화가 난 얼굴로 이불을 확 걷어냈다.
―야, 자잖아! 자는데는 개도 안 건드려!
"그게 무슨 소리냐구! 내가 왜 거짓말을 한다는거야! 알아듣게 얘기하란 말이야!"
잠깐 귀찮은 얼굴로 윤이를 응시하던 율이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야!"
―에이씨, 되게 징징거리네. 야, 너도 알잖아? 뭘 새삼스레 물어?
윤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율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어쩐지 몹시도 기분이 나빠졌다.
그와 비례해, 더 이상 율이의 말을 듣고싶지 않다는 마음 역시 커져갔다.
윤이는 휙 뒤돌아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러나 문자들은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운동화 끈을 다 묶은 윤이가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그의 어머니가 현관 앞까지 따라나와 배웅해주었다.
―오늘 아침 진짜 맛없었지? 니네 엄마는 어째 이십년 가까이 요리실력이 변하는게 없냐.
교복을 입은 율이가 시끄럽게 재잘거렸다.
그는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지만 학교에 갈 때면 언제나 윤이의 교복과 같은것을 입고 나타났다.
―야, 왜 대답이 없어? 황윤이. 화났냐? 내가 어제 거짓말쟁이라고 해서?
무슨 사내자식이 그렇게 꽁해. 화풀어라, 응?
율이가 마치 달래듯 말했다.
그래도 윤이가 대답하지 않자 율이는 또 성난 얼굴을 했다.
―야, 니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나같은 죽마고우를 냉대해?
어차피 내가 없으면 넌 또 혼자잖아. 이번에도 친구 하나도 못 사귀었으면서.
조소섞인 율이의 말에 윤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원체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의 윤이는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도 친구를 못 사귀었던 것이다.
―거봐, 나 없으면 니 곁엔 아무도 없다니까?
학교에 도착해 자리에 가방을 놓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날라왔다.
"멸치왔다 멸치!"
"좋은 아침이야 황멸치!"
"야, 말걸지마. 멸치 바이러스 옮겠다."
윤이가 소위 말하는 이지메를 당하게 된 것은 학기 초의 어느날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이 반에서 제법 잘나가는 녀석 하나가 율이를 못 마땅하게 생각했고, 그것만으로 율이가 왕따를 당해야할 근거는 완벽히 충족되었다.
윤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책을 펼쳐들었다.
대신 화난 표정을 한 율이가 성큼성큼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윤이는 안절부절 못 하며 율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율이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할 수는 없었다.
대신 윤이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야, 황율이! 뭐하는거야! 당장 이리로 안 와!"
―넌 가만히 있어 등신아.
율이는 누군가의 책상에 놓인 물병의 뚜껑을 열어 멸치라고 제일 먼저 외친 녀석의 머리에 부어버렸다.
잠깐동안 교실에 정적이 가득찼다. 윤이는 머리를 짚고 고개를 흔들었다.
율이를 볼 수 없는 아이들은 율이가 저지른 모든 일들을 윤이의 소행으로 믿는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중학생 때는 학교에서 쫓겨날 뻔 한 적도 있었다.
소위 뚜껑이 열린 상태가 된 율이가 윤이를 괴롭히던 한 녀석의 머리를 수 십차례 벽에 찍어버린 것이다.
"야…… 황윤이, 너 돌았냐?"
물벼락을 맞은 녀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에는 분노가 덕지덕지 묻어나왔다.
"저 새끼가 맛이 갔나."
다른 녀석이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그들의 흉흉한 표정으로 볼 때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딜 가시려고.
뒤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율이가 한 녀석의 바지춤을 잡아당겼다.
덕분에 그대로 걸음을 옮기려던 녀석이 휘청하더니 바닥에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심각하다면 심각한 상황인데도 너무 웃긴 꼴에 주위에서 키득키득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 씨발 좆나!"
욕을 내뱉은 녀석은 벌떡 일어서려고 했지만 그보다 율이가 빨랐다.
율이의 커다란 발이 녀석의 머리에 성큼 얹어진 것이다.
덕분에 녀석은 마치 압정에 고정된 애벌레처럼 퍼드덕거리게 되었다.
웃음소리가 더 크게 터져나왔다.
―야.
운동장 한 켠에 앉아있는 윤이에게 율이가 캔을 툭 던졌다.
―넌 왜 그렇게 당하고만 있냐?
윤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쯧하고 혀를 찬 율이가 말했다.
―그런 녀석은 오냐오냐하고 내버려두면 안 돼. 더 기어오른다고.
다신 쓸데없는 짓을 못하게 입을 짓이겨놓지 않으면 안 돼.
"가해자가 되는것보단 차라리 피해자인게 나아."
윤이의 말에 율이가 기막히다는듯 실소했다.
―미쳤냐, 너? 예수 납시었네.
"적어도 사람들은 피해자를 싫어하진 않잖아."
―아 씨, 미치겠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린 율이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잘 들어, 황윤이. 인간들이란 말이야, 피해자를 싫어해.
그래, 마음 깊이 싫어하진 않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절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단 말이야.
어느 집단에서든 제일 약한 개체에게 가학과 갈데없는 미움이 쏟아져.
인간은 희생양 없이는 못 사는 존재니까.
언제든 십자가를 짊어질 누군가를 찾는다고!
왜인줄 알아? 예수를 찾지 못하면 자기가 예수가 될 판이거든.
그게 이 사회의 암묵적인 룰이야.
짐승이라고 뭐 다를것같니? 다 똑같아. 살아있는건 그렇다구.
하교길이었다. 율이는 언제나처럼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율이의 옆모습을 힐끔 본 윤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이 어떤 녀석이든 난 쟤를 떠날 수 없어. 아무리 악마같은 말을 뱉어대도. 율이가 말했다시피 그애 마저 없다면 난 완벽한 혼자니까. 이러니 저러니해도 나를 위해주잖아?'
율이가 윤이의 생각을 읽은 것 마냥 씨익 개구지게 웃었다.
―저기 자리 났다. 얼른 앉아! 윽, 어떤 돼지가 자리로 뛰어오고 있어! 빨리 앉아!
율이가 가만히 서 있는 윤이의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혔다.
윤이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난 저 녀석 말고는 친구를 사귈 수 없을지도 몰라.'
"지금이 몇 신데 이제 들어와!"
거실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윤이는 잠에서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헤드폰을 쓰고 컴퓨터로 게임을 하던 율이가 키득키득 웃었다.
―느이 누나 거사 치뤘나본데? 어후, 여기까지 정액비린내 나는 것같아.
윤이는 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발바닥으로 바닥의 냉기가 싸하게 전해져왔다.
―윽, 죽었다.
칫, 하고 혀를 찬 율이가 마우스를 내팽겨쳤다.
율이는 흥미로 눈을 반짝이며 윤이의 뒤를 따라나섰다.
"좀 내버려둬요! 내가 지금 들어오든 말든 무슨 상관이에요!"
윤이는 인상을 쓰며 귀를 틀어막았다.
옆에서 모녀의 활극을 함께 지켜보던 율이가 비웃었다.
―저 면상으로 재주도 좋네. 피임은 했을까? 궁금하지 않냐?
"시끄러워."
―왜? 더럽지 않니?
율이의 입꼬리가 긴 호선을 그렸다.
"더럽긴 뭐가 더러워. 사랑하면 할 수도 있는거지. 도대체 넌 언제적 사고방식을……."
율이가 코웃음을 치며 윤이의 미간을 꾹 눌렀다.
―흥, 그런 거짓말은 인상이나 펴고 하시지.
율이는 신랄하게 조소했다.
―내가 그랬잖아, 넌 거짓말쟁이라고. 지금 누나의 정사장면을 훔쳐본 것 같지 않냐?
불쾌하지? 찝찝하지? 왜인줄 아냐? 넌 누나가 여자이길 바라지 않으니까.
누나는 그냥 가족 구성원의 일부인 <누나>로만 남아있었으면 하는게 너의 바람 아니냐?
윤이는 신경질적으로 속삭였다.
"왜 요즘들어서 쓸데없는 소릴 계속 하는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말도 안되는 소리 마."
―요즘 내가 네 입맛에 맞는 소리만 안 해줘서 기분 나쁘지?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네가 날 이렇게 만든거야, 황윤이.
창 밖으로 농구를 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날이 더워진 탓인지 다들 와이셔츠를 둘둘 걷어올린 채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어떤 녀석은 수돗가에 가서 숫제 머리를 감고 있다.
창에서 시선을 뗀 윤이는 한숨을 쉬었다.
―난 말이야, 네 그림자거든. 나를 부정하지 마.
나를 못되먹었다고 여겨도 되지만 너랑은 다른 존재라곤 생각하면 안 돼.
날 똑바로 봐. 넌 날 직시해야할 필요가 있어.
새벽에 들었던 말이 좀처럼 잊혀지지 않았다.
정말 드물게 율이는 성을 내지도 장난을 치지도 않았다.
―그게 내 존재 이유야, 황윤이.
"아씨, 미치겠네……."
"뭐가?"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윤이는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반장이 팔1짱을 낀 채 그의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아냐."
"내가 널 학기 초부터 계속 관찰했는데."
잠깐 말을 멈춘 반장이 윤이의 주위를 빤히 쳐다보았다.
"넌 계속 혼잣말을 해. 꼭 주위에 누가 있는 것처럼. 정신병 있냐? 아님 귀신이 보인다고 말하고 싶은거냐?"
윤이는 율이가 곁에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새벽 내내 즐겁지 않다고 중얼거리던 그는 아침이 되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율이는 대체로 윤이의 곁에 붙어있었지만, 윤이와 싸운 날이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엔 없어져버리곤 했다.
"신경 꺼."
윤이가 싸늘하게 말했다.
신경질적으로 코웃음을 친 반장이 윤이의 책상에 한 손을 턱하니 얹었다.
"말 한 번 에쁘게 한다. 그러니까 친구가 없는거지. 기껏 걱정해줬더니."
"넌 그게 걱정해주는 말뽄새냐?"
"니 말뽄새보단 나아."
마치 듣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본 반장이 약간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니가 좋은건 아니지만, 이래뵈도 이 반 반장이니까…… 혹시라도 누가 괴롭히거나 힘든 일 있음 말해."
스스로도 뱉어놓고선 민망했는지 반장은 "이러니까 무슨 성장드라마같군." 하고 중얼거렸다.
집으로 돌아가자 예상대로 율이는 자신의 방에 있었다.
―그 앵알거리는 반장이랑 재밌었냐?
침대에 길게 엎드려 있던 율이가 고개를 틀어 윤이를 삐뚜름히 올려다보았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 피곤해. 비꼬지 마."
―혹시라도 누가 괴롭히거나 힘든 일 있음 말해.
다소 빠른 반장의 목소리를 우스꽝스럽게 흉내내며 율이는 웃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장난끼에 가득 차 있다기보다는 어딘지 불쾌해 보였다.
―야, 그런 샌님이 시비거는데도 가만히 있었냐? 멸치는 니가 아니라 걔야, 빌어먹을.
윤이는 결국 버럭 소리질렀다.
"황율이! 참는것도 한계가 있어. 너 요즘 왜이래? 왜이렇게 매사에 삐딱해? 전엔 우리 좋았잖아. 너도 남 욕같은건 안 하고. 어째서 이렇게 변해버린거야!"
같이 소리를 지르거나 어제처럼 또 알 수 없는 말을 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율이는 슬픈 얼굴을 했다.
―니가 변했으니까.
"뭐?"
―나는 너의 외로움에서 태어났어. 너만 변하지 않았다면 난 여덟살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을거야.
윤이가 멍하니 바라보자 율이가 비뚤게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이젠 얘기가 다르지. 난 언제나 네 곁에 있을거야.
나를 너무 믿지 마. 난 언제나 네 편이지만 완벽하게 널 위할 수는 없어.
바닥까지 널 위해버리면 내가 사라져버릴 판이거든.
"야, 멈춰."
험악한 표정을 지은 남학생들이 윤이를 둘러쌌다.
단어장을 보며 하교하던 윤이는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황멸치, 많이 컸다 너?"
그 녀석이었다. 율이에게 호되게 망신을 당한.
윤이는 습관적으로 옆에서 발맞추어 걷고있는 율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율이는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키는게 좋을거야."
윤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쭈, 이 새끼봐라? 무슨 자신감이야? 뒤지고 싶냐?"
"농담 아니니까 그냥 가. 일 크게 벌이기 싫어."
윤이의 말에 낄낄 웃음이 터져나왔다.
율이의 얼굴이 숫제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엄지손톱을 잘근거려보았지만 초조함은 없어지지 않았다.
윤이는 절망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율이는 율이의 예상대로 그 녀석들을 가만히 두질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정도가 너무 과하다는 데 있었다.
그것은 윤이가 태어나 본 가장 끔찍한 광경임이 틀림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윤이는 율이가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그 녀석은 제정신이 아니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예전의 내 친군 어디에도 없어.'
그렇게 생각하고나니 어쩐지 서글퍼졌다.
윤이는 떠올렸다.
운동장 한 켠에서 언제나 함께 두꺼비집을 지으며 놀았던 동그란 얼굴의 소년을.
'율이가 한 짓은 모두 내가 책임지게 되겠지. 정말 감당할 수 없어.'
―니가 좋은건 아니지만, 이래뵈도 이 반 반장이니까…… 혹시라도 누가 괴롭히거나 힘든 일 있음 말해.
문득 생각난것이 반장이었다.
윤이는 자신의 편협한 인간관계에 실소했다.
"믿을 수가 없군. 그러니까 그 율이라는 녀석은 네 눈에만 보인다는거지?"
반장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어. 어릴적엔 친구가 생겨서 그저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너무 버거워. 이러다간 살인날지도 몰라. 거기다 그 녀석이 내뱉는 말 때문에 괴롭다."
"넌 그 녀석이 왜 생겨났다고 생각하는데?"
제법 날카로운 질문에 윤이는 약간 우물거렸다.
"그 녀석이 자긴 내 외로움에서 태어났다고 했어. 그러니까 내가 외로워서……."
"잘 생각해봐. 혹시 그 율이라는 애가 하는 말이 사실은 네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아닌지."
"뭐?"
윤이가 얼빠진 듯 되물었다.
"내가 봤을때 넌 또 다른 객체가 필요했던거야. 네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꽁꽁 싸담을 수 있는 객체. 너는 착하고 예의바른 아이여야만 하니까. 틀려? 넌 황율이란 존재를 만들어서 네 부정적인 감정들을 모두 쏟아부은거야."
틀려? 재차 다그쳐오는 질문에 윤이는 그저 멍해있었다.
―저 계집애는 어쩜 저렇게 되바라졌는지 몰라. 윤이야, 넌 네 누나랑은 달라. 착한 아이니까.
―난 너 뿐이다, 윤이야. 넌 네 아비와는 다르지? 착한 아이잖니? 이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을거지?
불이 꺼진 방에 들어서자 율이의 목소리가 비꼬듯 날라왔다.
―그 샌님 반장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별 상담을 다 하고왔네?
윤이는 입을 굳게 다물고 율이를 바라보았다.
"율이야, 전에 니가 그랬었지. 내가 변해서 너도 변했다고."
―그래서?
"혹시 그 말이…… 내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되어서 너도 변했다는…… 그런 뜻이야?"
―에이씨.
율이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 니가 외로움만 가지고 있을 땐 나도 외로움밖엔 몰랐지.
니 감정이 곧 내 식량이니까. 난 네 감정에 기생해서 사니까.
하지만 니가 증오를 알고 절망을 알고 울분을 알았을 때 나도 그걸 알았어. 알아들어?
니가 나한테 준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난 그런 부정적인 감정밖엔 표현할 수 없어.
난 행복이란게 뭔지도 모른다고!
그 순간 윤이는 깨달았다.
율이는 악마도 무엇도 아닌 그저 자신의 이기심으로 태어난 희생양이라는 것을.
―인간은 희생양 없이는 못 사는 존재니까.
언제든 십자가를 짊어질 누군가를 찾는다고!
왜인줄 알아? 예수를 찾지 못하면 자기가 예수가 될 판이거든.
그 순간 율이에 대한 안타까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야, 야, 너 울어? 왜 울어! 야!
율이의 당황스러운 목소리에 그제서야 윤이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서야 알았어. 넌 나였구나. 넌 그저 나일 뿐이었어."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먹고 자란 또 다른 자아.
단지 있다고 믿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존재.
역으로 있다고 믿지 않으면 언제라도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아이.
―난 말이야, 네 그림자거든. 나를 부정하지 마.
나를 못되먹었다고 여겨도 되지만 너랑은 다른 존재라곤 생각하면 안 돼.
날 똑바로 봐. 넌 날 직시해야할 필요가 있어.
그게 내 존재 이유야, 황윤이.
윤이는 계속해서 흐느꼈다. 계속.
―이제 알았지? 왜 내가 완벽하게 네 편이 되어줄 수 없는지.
널 위해서라면 진작 사라져줘야겠지만 그러기 싫었거든.
그 말을 끝으로, 율이의 존재는 사라졌다.
세상 그 어디에도 없이.
방 안은 율이만 없을 뿐 여느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날, 윤이는 친구를 잃었고, 어른이 되었다.
終
기괴한담奇怪寒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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