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명색이 고참인데 여기서 주눅든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
"하아......미치겠다. 너..너 지금 뭐라고 했냐"
그런데 이 씨발놈은 내 말을 듣기나 했는지 그는 하던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그들이 나타나면 너무 무섭습니다. 하나같이 살기 어린 눈을 하고 있습니다.
군인들인데 몇몇은 저희하고 복장이 다릅니다.
얼룩무늬 전투복이 아닌 옛날 민무늬 전투복을 입고 있습니다.
게다가...전쟁 중인 것도 아닌데 무장을 하고 돌아다닙니다."
아..... 씨발... 이 말을 믿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나는 뭔가 낚인 듯한 기분이 들면서도, 그의 말을 중지시킬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이 순간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그러니까... 아... 씨발 니가 본 게 귀신이라는거야??"
"다른 사람들은 못보는데 그게 귀신이 아니고 뭡니까?"
어느 틈엔가 그는 울먹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놈들이 어디에 있는데?"
"모릅니다. 그 때 그 때마다 나타나는 장소가 다릅니다.
저는 그들이 나타날 때면 가만히 서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들의 행동을 관찰합니다."
난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이명증처럼 귀에서 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 자식이 나무토막처럼 가만히 서서 눈깔을 돌리는 이유가 이것이었다니....
그러고 보니 어제 이 곳에서도 그는 같은 행동을 보였다.
다시 한번 온 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그럼.. 너.... 아 씨발..... 어제도 여기서 봤냐?"
"네. 무장을 한 어떤 군인이 세면장에서 물을 먹고 갔습니다.
얼굴에 검은 위장크림이 발라져 있고, 한 쪽뺨에서는 피가 흘러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막 전투를 마치고 온 군인처럼... 그리고...."
"그리고...뭐?"
그는 정말로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물을 한모금 들이키더니 시커먼 얼굴로 저를 한 번 쳐다보고 미소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세면장 주변을 몇바퀴 뱅뱅 돌더니, 두 손으로 벽을 긁으며 타고 올라가 창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유격장에서 담 넘듯이 말입니다."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세면장 안의 구석구석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너.. 씨발 이거 거짓말이면 내 손에 죽는다..."
"거짓말 아닙니다."
나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답은 당당했다.
"그럼 윤상병님 얘기가 뭐야?"
"어제 오전 싸리나무 채취 작업을 하러 갔습니다.
저는 길을 모르기 때문에 고참들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산 중턱쯤 올랐을 때 입니다.
처음엔 계곡길을 따라 걸었는데 무수한 돌 사이에 안전하게 발을 딛고 걷기 위해 밑을 보느라, 앞을 볼 일이 없었습니다.
잠시 후 숲속으로 들어 섰을 때 그때서야 저는 앞을 쳐다봤는데, 일렬로 쭈욱 늘어선 우리 사이에 누가 같이 걷고 있는 겁니다."
나는 정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일반 작업복 차림인데 누가 철모를 쓴 무장한 군인 한 명이 윤상병님 뒤에서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걷는 중간 중간 우거진 억새풀 속에서 무장한 군인 세 명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전 분명히 보이는데 아무도 못 본척하고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억새풀숲에서 나와 윤상병님을 둘러싸고 걷는 겁니다. 전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는데 미친 놈 소리 들을까봐 간신히 제 입을 틀어막고 견뎠습니다."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강수의 부릅 뜬 두 눈에 어느 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작업하는 얼마 동안 그들은 윤상병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보이지 않았다가 작업이 끝날 때쯤 윤상병님과 싸리나무를 같이 들어주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막사까지 내려온 그들은 자기들끼리 뭐라 계속 수근거리더니, 쓴웃음을 짓고는 다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건 거짓말이다.
이 새끼가 자기 미친 놈이니 건들지 말라고 거짓말하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얘기를 듣고 있는 나는 뭔가?
나는 이렇게 수 없이 내 자신을 세뇌시키며, 그가 보았다는 것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을 찾으려 노력했다.
결론은 둘 중에 하나이다. 이강수 이놈이 미쳤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난 갑자기 너털눗음이 나왔다.
"하하하하하....... 미친 또라이새끼... 그러니까 윤상병님이 귀신 때문에 죽었다?"
이 말에 그는 눈 주변을 손으로 닦고 나를 주시했다.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이 얘기 또 누구한테 했냐?"
"지금이 처음입니다."
바로 그 때 고참들이 씻기 위해서 세면장으로 하나 둘씩 수건을 들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 뭐야? 아직도 식판 닦냐?"
"네. 그렇습니다."
"빨리하고 쉬어야지."
"네. 알겠습니다."
나는 남은 식판을 다시 열심히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른손 검지를 입에 갖다대며 그에게 입다물 것을 명령했다.
"하여튼 어제부터 이상했다니까......."
세면장에 들어온 고참들이 서로 말을 주고 받고 있었다.
"윤ㅇㅇ, 그 자식 졸라 몸이 약해서 산에 오를 때 중간중간 쉬었잖아. 그런데 어제는 한번도 쉬지 않고 산을 오르더라니까.
엄청난 양의 싸리나무 짊어지고 내려가는 것 봤냐? 너 그거 봤으면 놀랬을거다. 난 어제 그 자식이 무슨 약 먹은 줄 알았다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정수리에 얼음물이 떨어지는 듯한 짜릿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있을 이강수가 말한 뒷산과 인접해있는 2초소 근무가 걱정되었다.
'씨발......... 공포의 밤이 되겠군.'
내무반과 식당 사이에 있는 2초소는 이강수가 말한 뒷산과 인접해 있다.
그렇게 자주 다니던 뒷산이 어느 순간 공포의 장소로 바뀐 것이다.
'아... 씨발.. 어쩌다가 저런 또라이새끼가 들어와가지고..'
새벽 1시 근무 중 짜증을 내는 듯한 나의 표정을 보았는지 근무 사수인 최병장이 나에게 물었다.
"너 왜 그러냐? 무슨 일 있냐?"
최병장은 원래 우리 부대원이다. 그리고 친형처럼 나에게 굉장히 잘해 준다.
"그게 말입니다..."
말해야 되나 말하지 말아야 되나...이런 고민을 잠시 했지만 내 입은 벌써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이강수 이 자식이 부대에서 자꾸 귀신이 보인다고....게다가 윤상병이 죽은 것도 귀신 때문이라고.."
최병장은 무슨 애들 귀신놀이 정도로 생각한는지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장난 아닙니다. 그 자식 말하는 거 들어보면 바로 옆에서 지켜본 것처럼 말합니다.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은데 너무나 진지하게 얘기를 해서.."
"허허...그래? 진짜로 이 산에 귀신이 사나보네."
나의 심각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최병장은 여전히 웃음진 얼굴로 말을 했다.
"예? 알고 계셨습니까?"
"그게 아니라 내가 졸병 때 하사 생할만 5년을 한 선임하사가 있었다.
170이 안되는 키에 몸은 완전히 터미네이터처럼 단단했지.
포병대대에서 애를 하나 잘못 패서 진급 떨어지고 우리 부대로 온거야.
부대원이 20명 남짓한 부대였으니 그 사람 눈에 제대로 된 부대로 보였겠냐?
맨날 산에 혼자 올라가 봄에는 취나물 캐러가고, 여름이면 머루나 더덕캐러 다녔단다.
그런데 아무도 뭐라 그러는 사람이 없었어.
당시에 그가 그냥 중사 진급 포기하고 제대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지.
제대 후 빵집을 하겠데나? 그 우악스런 손으로 빵을 만들고 있는 것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오기도 했지.
어쨌든 얼마 후 그 사람은 제대했어. 그런데 말야.."
나는 계속 최병장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 사람이 제대하기 전 날 부대원들하고 간단히 맥주 한 잔 하는데 그러더라구.
저 식당 뒷산에 혼자 가지 말라고. 무서운 기운이 감돌고 있다나 뭐라나.
자기는 혼자 열심히 돌아다녔으면서 우리한테 이러는 게 우스웠지.
그런데 자기는 그 걸 느낄 수 있다면서 정말 심각한 얼굴로 얘기하는거야.."
얘기를 듣고 있는 나는 다시 한번 짜증이 밀려왔다.
'아... 씨발. 오나가나 귀신얘기 뿐이네....'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있는지 최병장이 나를 안심시켰다.
"귀신 얘기는 어느 부대에나 있는거야. 너무 신경쓰지마.
나도 처음에 그 사람 얘기 들었을 때는 무서웠는데, 지금은 그냥 추억거리야."
"혹시 혼자 저 뒷산에 돌아다녔던 사람 없었습니까?"
"야 임마. 군대에서 야산을 혼자 돌아다니면 어떡해? 게다가 부대원도 적은데 누가 없으면 바로 티가 나잖아."
그런데 갑자기 최병장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삐쭉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 그래... 그러고보니 한 번 있었다."
나는 침이 한번 꼴깍 넘어갔다.
"언제 말입니까?"
"한 참 됐지. 이 건 내가 겪은 건 아니고 내가 자대 배치받기 바로 직전에 있었던 일이야.
이 조그만 부대에서 호남파, 영남파가 갈렸었나봐.
호남출신이 왕고가 되면 영남출신 애들을 갈구고, 영남출신이 왕고가 되면 다시 호남출신 애들을 갈구고...
이런 식으로 군번을 따라 내려가면서 복수와 응징이 난무했나 보더라구.
그런데 그 걸 참지 못한 이등병 하나가 오후 일과 도중에 탈영을 한 거야.
저녁이 다 되어 가는데 보이지 않는거야. 전 부대원들이 비상 걸려서 그 사람을 찾아나섰대.
보통 부대원이 탈영했을 때, 무장탈영이 아니면 사단에 바로 탈영 신고 안해.
그냥 부대 자체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탈영병이 생기면 부대 간부들 진급은 물 건너갈 수 있거든.
해가 기울고 나서야 중대장은 탈영신고를 결심했지. 그런데 말야..."
"그런데 뭡니까?"
"저녁 8시가 다 되어갈 쯤 탈영한 이등병이 넋나간 표정으로 뒷산 계곡길을 따라 취사장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 내려 오더라는거야.
그걸 취사병이 발견하고 부대에 신고한거지. 그나마 다행인게 그 때까지 사단에 보고가 안됐다고 그러더라구.
그 이등병이 조사과정에서 입을 열면서 그 뒤로 부대는 발칵 뒤집혔지.
호남파, 영남파 두목들은 군기교육대 갔고, 나머지 똘마니들은 부대 자체 군기교육을 받았나봐.
그런데 왜 돌아오게 되었는지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등병이 이상한 말을 하더래."
나는 다시 한번 침을 삼켰다.
환하게 떠오른 달이 오히려 음산한 기운을 더하는 것 같았다.
"탈영을 했는데 여기 산악지리를 잘 모르니까 길을 잃었나봐. 도시에 살던 놈이 산악지형을 우습게 본거지.
그래서 다시 오던 길로 내려가서 길을 찾으려 했는데, 산속은 원래 해가 빨리지잖아.
어둑어둑한 산 속에서 군인들이 보이더라는거야.
아무 말없이 야간 침투훈련 하는 것처럼 총을 들고, 산 중턱을 아주 느린 속도로 조금씩 조금씩 걸어 올라가더라는거야.
처음에는 자신을 찾기 위해 출동한 군인들인 줄 알고, 그 자리에 얼른 숨었대. 그런데 뭔가 이상하더래."
난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이렇게 여유롭게 얘기하고 있는 최병장이 부러웠다.
"뭐가 말입니까?"
"손전등을 들고 있지도 않고, 자신을 부르는 것도 아니고, 부대마크도 없더라는 거야.
게다가 그 때는 대침투 훈련이나 대항군 훈련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야."
"간..간첩 아닙니까? 무장공비나 이런 거..."
그러자 최병장이 피식 웃으며, 나에게 말을 했다.
"야. 무슨 공비가 그러고 침투하냐? 낮에는 비트에 숨어있다가 밤에는 능선타고 무지하게 빠른 속도로 이동한다더라.
그리고 여기가 무슨 주요 거점지냐? 솔직히 우리부대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거지."
나를 놀래키려는지 최병장이 얼굴을 가까이 하며 속삭였다.
"그리고 잠시 후 정말로 아무 소리없이 숲으로 싹 사라지더래.
그 이등병은 너무나 무서워서 탈영을 포기하고, 내려온거야. 졸라 골 때리지?"
그러나 나는 별로 골 때리지 않았다.
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최병장이 얼굴을 더 가까이 하며 속삭였다.
"또 하나 골 때리는 건 그 군인이 까만 얼굴에 민무늬 전투복을 입고 있더라는 거야. 아주 옛날 거.."
나를 놀래키려던 최병장은 오히려 나의 외침에 더 놀라버렸다.
"맞단 말입니다!! 이강수, 그 자식이 똑같은 말 했단 말입니다. 까만 얼굴에 민무늬!!!"
갑작스런 나의 외침에 뭔 일이냐는 듯 최병장은 장난스럽던 얼굴을 지우고, 멍한 얼굴로 나의 얼굴을 살폈다.
"야 임마. 왜 그래? 여기 근무지야. 목소리 낮춰."
나는 순간 내가 최병장보다 한참 아래 졸병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시.. 시정하겠습니다."
그러자 최병장은 경색된 얼굴을 풀고,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을 이었다.
"후후...너도 군생활 해 봐라. 졸라 골 때리는 일 많이 겪을거다.
그리고 그런 얘기 너무 믿지마라. 믿으면 믿을수록 너만 피곤해진다.
이강수 걔가 귀신을 본다면, 그 놈 능력인거야. 신경쓰지마.
너 이거 아니어도 아직 졸병이라 신경쓸 게 많잖아. 너 요즘 부대 증편되면서 많이 힘들지?"
"아.. 아닙니다."
"뭐가 아냐 임마. 미친 놈들이 세트로 들어왔는데, 안 봐도 뻔해."
그 말에 나는 갑자기 두려움은 사라지고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눈물을 보이진 않았지만 앞으로 남은 눈앞이 캄캄한 군생활을 생각하니, 정말 기가 막혔다.
집에 가고 싶었고, 어머니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사회에서는 이러지 않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병신같이 보일까?
정말 사회에서는 두려움이라는 게 없었는데, 오히려 군대에 와서 나약해진 듯한 이 기분.
"윤상병 죽기 전부터 부대 간부들도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다.
만일의 경우 적응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걔네들 다시 전출보내려고 생각 중인가봐.
후...... 그러게 뭔 짓이야. 부대를 증편하려면 신병으로 했어야지."
공포의 밤일 것 같았던 그 날밤 근무는 최병장의 도움으로 무사히 지나갔다.
오전 9시에 진급자들 진급신고가 이루어졌고, 나는 드디어 작대기 두 개를 달았다.
사이코같은 고장포 상병도 병장 진급을 했다.
산적처럼 생긴 우람한 덩치에 걸맞지 않는 말투는 항상 나를 역겹게 만들었다.
"어머... 씨발. 내가 병장이라니. 얘들아~~~ 나 어때? 뽀대나지 않니?"
고장포인지, 고장난 대포인지 그 놈은 연신 자기 야전상의의 계급장을 쓰다듬으며 자랑을 했다.
"멋지십니다!!"
졸병들은 웃는 얼굴로 그를 대했지만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단어뿐일 것이다.
'미친 놈!!'
나는 진급의 기분을 즐기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오전 10시 쯤 헌병대 조사관이 부대에 왔기 때문이다.
부대 인사계와 같은 상사였는데 나이는 꽤 젊어보였다.
우리는 내무반 내에서 모두 동시에 그 날 일과를 모두 적어냈다.
조사관은 자신에게 특별히 할 말이 있으면 적어도 된다고 했다.
모든 걸 폭로하고 싶었지만, 그 조사관과 나머지 군생활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님을 모두들 잘 알고 있었기에 함구했다.
1차 조사가 끝나자 갑자기 그 조사관은 일병과 이등병을 모두 식당에 집합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병장과 상병들은 내무반에서 절대로 나오지 말도록 했다.
"모두 팬티만 남기고 하의를 벗는다. 실시!!"
조사관 앞에 횡대로 늘어선 우리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잠시 멀뚱멀뚱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에 옆에 있던 소대장이 우리에게 설명했다.
"구타 검열하는거야. 조사관 말 따라. 벗는다 실시!!"
"실시!!"
우리는 복창과 함께 하의를 벗고 다시 제자리로 정렬했다.
유심히 우리를 이리저리 살피던 조사관이 이것 저것 물었다.
"너, 이리 나와봐. 조인트 많이 까였네."
김ㅇㅇ 일병이 걸려들었다.
밤마다 불러내 정강이 까는 상병놈에게 가장 많이 당한 부대원이었다.
조사관은 이유도 묻지 않았다.
"누구야? 불어!!"
"네? 뭐 말입니까?"
이에 의자에 앉아있는 조사관은 식당탁자를 손으로 치며, 언성을 높였다.
"누구야? 새꺄!! 너 조인트 깐 놈이!!"
조사관의 행동에 모두들 움찔했지만 김일병은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다.
" 작업하다 다쳤습니다!!"
"이 새끼가 날 호구로 보나. 똑바로 말 안해?"
"정말로 작업하다 다쳤습니다!!! 정말입니다!!"
모든게 그렇지 않은가? 본인이 부정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조사관은 대대장에게 보고하겠다고 한 차례 협박을 한 후, 김일병을 자리에 돌려 세웠다.
"자, 이제 상의를 벗는다. 실시!!"
"실시!!"
웃옷을 모두 벗는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부정해도 어떻게 변명할 거리가 없는게 있었다.
바로 가슴에 난 피멍자국이었다. 소대장도 깜작 놀란 표정이었다.
구타검열 나오는 것 알았았으면 입이라도 맞춰 놀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죽은 윤상병 사건만 조사하고 갈 줄 알았던 것이다.
얼마 후 미친 사무라이 김병장은 15일짜리 영창에 끌려갔다.
부대 분위기는 극도로 위축되었다.
사병 한 명은 죽고, 부대원 한 명은 영창가고....
대대장과 중대장은 수시로 사단본부에 불려가는 것 같았다.
나중에 윤상병의 사인은 전환장애에 의한 돌연사라고 밝혀졌다.
나는 그 때 전환장애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특별히 몸에 이상이 없는데도 시름시름 앓는 병이라고 한다.
이게 지속되면 신체적 장애 뿐만 아니라 정신질환까지 온다고 한다.
군생활 동안 받은 극도의 스트레스가 그를 죽음으로 몰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한 동안 이강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예 모르는 척 했다.
그도 내 행동의 의미를 눈치챘는지 특별한 일이 아니면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런데 여전히 가끔씩 통나무처럼 뻣뻣이 서서 눈알을 굴리는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그 때마다 내 온몸은 소름으로 뒤덮였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부대원들 몇몇이 오전 종교행사로 읍내로 나가게 되었다.
나는 종교가 없어서 나갈 일이 없었지만 가끔 고참들이 바람 쐬어 주려고, 종교행사를 핑계로 나를 데리고 나간다.
교회에 갔는데 나는 거기서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그 녀석은 부럽게도 상병을 달고 있었다.
"야...새꺄 오랜만이다."
우리는 몇 마디 인사를 주고 받으며 안부를 물었다.
"근데 너 어디에 있냐?"
"공병대에 있어. 아우 씨발 졸라 힘들어."
"뭐? 공병대?"
나는 갑자기 중요한 질문거리가 하나 떠올랐다.
"너. 이강수 알아?"
"뭐? 갑자기 뭔 이강수?"
"니네 부대에서 전입 온 이등병 말야!!"
"우리 부대에서?"
나는 다급했는데 친구 녀석은 바쁘지 않다는 듯이 여유로웠다.
설마....'그런 사람 없었어' 또는 '걔는 몇 달 전에 죽었어' 이런 말은 하지 않겠지?
"키 작고 얼굴 하얗고, 여자같이 생긴 놈!!"
"아............ 그 이강수!!!"
그제서야 친구는 알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씨발.. 다행이군.
"걔 니네 부대로 갔냐?"
난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너 그 자식 어떤 놈이었는지 알아?"
"어? 이상하다. 니네 부대로 간게 아니라 치료 받으러 간다고 했는데."
"뭐? 치료?"
"걔 약간 정신병 있었어. 몰랐냐?"
"헐..."
"걔가 병원에 간 지 벌써 두 달 넘었을 걸?
"그럼 우리 부대 생활 빼면 한 달 넘게 병원에 있었다는 얘기네."
"그렇게 되나? 하여튼 걔 자대생활 2~3주 정도 했나? 아주 유명세를 떨치던 놈이었지."
"뭐가?"
"난 또라이 중에 그런 생또라이는 처음 봤다니까.
우리 사단은 유격훈련이 전반기 후반기 나뉘어져 있잖아.
걔가 들어오자 마자 우리는 후반기 유격에 들어간거야.
그 자식 입장에서는 무지하게 꼬인거지.
그런데 그 자식 체력이 좀 약하더라구. PT체조나 산악훈련에서 늘 쳐지고.
걔 때문에 우리가 조교들한테 얼마나 굴렀는지 아냐?"
얘기를 하던 친구가 무슨 일급 비밀이라도 알려주느냥 얼굴을 가까이 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정신이 확 깨는 일이 있었다. 한 번은 화생방 훈련 때 가스실에 들어갔는데 말야...."
"들어갔는데..뭐?"
"그 자식 나하고 같은 조였거든? 방독면을 쓰고 들어가서 군가 한 곡 부르고 방독면을 벗어야 되는 거 알잖아.
조교가 '0.1초 안에 방독면을 벗어서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실시!' 이러니까 우리는 후다닥 벗었지.
그런데 그 놈이 꾸물대다가 조교를 열 받게 한거야. 그래서 조교가 다시 방독면을 쓰라고 명령한거야.
생각해 봐. 방독면을 써도 숨쉬기 거북한데, 방독면 안에 가스까지 차 있었으니..애들 거의 죽어났지.
차라리 방독면을 벗고 화끈하게 끝내고 나오는 게 오히려 사는 방법이더라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강수 걔가 방독면을 쓴 상태에서 미친 놈처럼 막 소리를 지르더라니까.
가까이 오지마!! 저리가!! 오지마!! 악!! 이러면서 몸부림을 치더라구"
"그래서?"
"같은 조에 속한 우리 뿐만 아니라 조교들도 순간 움찔했지.
그런데 걔가 계속 소리를 지르는데 말야.
소리를 지를 때마다 방독면 배기구 쪽에서 정체 모를 거품이 부글부글 끓더라구.
그리고 무슨 땀을 그렇게 흘리는지 방독면에서 알 수 없는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거야.
처음엔 가스실이 약간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모두들 바닥에 떨어진 액체의 정체를 보고 깜짝 놀랐지. 피였어!"
"뭐? 피?"
"조교들이 놀래서 우리 조를 급히 내보냈지. 그리고 교관이 와서 그 녀석 방독면을 벗게 했어.
지켜보던 우리는 씨발 졸라 놀랬다. 방독면을 벗는 순간 피가 거의 한 바가지가 쏟아지더라니까.
난 처음에 토한 줄 알았거든? 그런데 피를 닦고 보니까 코피가 터진 거였여.
교관이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코 점막이 약하대나 뭐라나 그러더라구.
그러니까 교관은 다음에 올 때 군의관 진단서를 끊어오면 가스실 훈련을 열외시켜 주겠다고 하더라.
그리고 왜 가스실에서 소란을 피웠냐고 물으니까 가스실이 너무 무서워서 그랬단다.
이건 뭐 병신도 아니고, 이등병 새끼가 완전히 군기가 빠진거지. 그런데 걔 또라이 짓은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어."
"또 뭔데?"
"우리 부대는 차량이 많아서 유류고 근무지가 따로 있거든.
거기는 약간 산 속으로 들어가 있어.
밤에는 조금 무섭긴 해도 주변 경관도 좋고 근무 할 만 해.
그런데 유격훈련에서 돌아 온 그 미친 놈이 유류고 근무는 절대 안 가겠다고 발악을 하는거야.
이런 생또라이가 있냐? 부대에 갓 들어온 이등병이 말야. 졸라 처맞고도 못하겠다는거야.
결국 우린 포기하고 그 놈이 짬밥이 안되니까 위병소 근무까지 빼고 걔를 탄약고 근무로만 돌린거야."
"그런데 왜 병원까지 갔냐?"
"야 씨발 말도 마라. 밤만 되면 괴성을 지르고, 잘못했다면서 이리 저리 뛰어다니더라니까.
결국 대대장 명으로 군병원으로 갔지. 그 자식 어쩌면 군 생활 안하려고 꾀 부리는지 몰라.
내가 아는 고참도 어깨 탈골로 입원한 적 있거든?
그런데 병원생활이 너무 좋으니까 퇴원 직전에 어깨를 몇 번 강제로 뺐다고 하더라.
그리고 두 달 가까이 병원에서 놀았잖아. 아참, 그런데 그 놈 니네 부대에서도 그러냐?"
"그 정도로 심한 건 아니고 자꾸 귀신같은 게 보인다고 나한테 그러더라구.."
"미친 놈... 병원에 있을 때 시나리오 잘 짜왔나 보네."
나는 이강수 그 놈한테 속은 듯한 기분이 들면서도, 오히려 더 불길해지는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친구와 작별 인사를 뒤돌아 섰는데 그 때 친구가 나를 다시 불렀다.
"야....그런데 고장포 잘 있냐?"
"뭐? 그 사람도 니네 부대에서 왔냐?"
"그 자식 졸라 찌질이야. 졸병 때부터 한 대 맞으면 눈물 질질 짜던 놈이지.
보기에는 덩치 크고 험악해 보여도 무지하게 마음 여리다.
아니 세상에 이강수는 차출되었다 치더라도, 천출병 희망자 받는데 병장 진급 앞두고 보내 달라는 놈이 어딨냐?
이 건 뭐... 할 말이 없다. 내 고참이었지만 군 생활은 졸라 찌질했지. 그래서 쪽팔리니까 갔는지도 몰라."
그러고 보니 이강수와 고장포가 서로 얘기 나누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강수를 무서워 하는 건가? 아니면 서로 모르는 척 하기로 한 건가?
난 그 뒤로도 며칠 동안 이강수와 필요한 말 이외에는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솔직히 두려웠다. 정신병으로 치료까지 받은 놈이 무슨 짓을 못하랴?
다 들 자고 있는 밤에 총이라도 난사하는 날에는 모두 황천길로 가는 것 아닌가?
다르게 생각해 보면 아주 나쁜 놈이다. 군생활 안하려고 미친 짓 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나를 가지고 놀면서 지 맘대로 행동할 수 있지 않은가?
고장포 병장도 말을 안 걸 정도인데, 이강수 이 자식은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볼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난 그에게 말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전에 부대에서 유격 받을 때 사고 쳤다며?"
"무슨 사고 말입니까?"
그는 늘 그렇 듯 차렷자세를 유지하며, 내 옆에서 내가 식판 닦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너 임마 가스실에서 코피 터지고 난동 부리고, 게다가 부대에서도 근무 서기 싫다고 난동 부렸다며?"
"난동 아닙니다."
"그럼 뭐야? 귀신이라도 본거야?"
"네. 그렇습니다."
"아... 씨발 그 놈의 귀신 타령.... 군생활 날로 먹겠다는 수작 아냐?"
"아닙니다."
지금까지 당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자 나는 갑자기 그가 혐오스러워졌다.
"뭐가 아냐 씨발놈아!!!!!!!!!!!"
나는 닦고 있던 식판을 세면대 위에 내리치며 화를 냈다.
마음 같아서는 식판으로 싸대기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화를 버럭 내자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표정을 보자 나는 차마 정신병 치료 받았느냐는 말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너... 씨발 한 번만 내 앞에서 귀신이니 뭐니 이런 소리 하면 죽을 줄 알아. 알았어?"
"네...알겠습니다."
말이 끝난 뒤 나는 닦고 있던 식판을 계속 문질렀다.
그런데 이 개운치 않은 기분은 뭔가?
미치겠다. 저 자식이 그냥 미쳤다고 보기에는 뭔가 안 맞아..
아....씨발 내가 병신같지만 물어보고 싶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쪽팔림을 무릅쓰고 시선을 피한 채 그에게 물었다.
"요즘도 보여?"
"............"
"요즘도 그 민무늬 군바리들 보이냐고?"
나의 질문에 그 녀석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오늘.... 나.... 낯 익은 사람이 한 명 보였습니다."
나는 순간 길게 숨을 들이 마신 후 천천히 내뱉았다.
전방 부대의 11월은 사회보다 훨씬 춥다.
내가 숨을 내뱉자 응결한 수증기들이 긴 깔대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아............ 씨발 또 괜히 물어봤다.
"후.... 씨발 그러니까... 헐... 말이 안 나온다."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짓누르며 다시 한 번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니까... 너 지금 죽은 윤상병이라도 보인다는거야?"
"네."
젠장 나는 터질 듯한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물어봤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간단한게 대답하였다.
"후......이젠 귀신들이 종류별로 나타나는군. 예전에 죽은 귀신, 최근에 죽은 귀신......
잘하면 이 부대에서 죽은 귀신들 모여 동문회라도 하겠네."
"..........."
"윤상병 지금 어디 있는데?"
"부대 막사 주변에서 가끔씩 보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뭔가를 물어보는 것은 의미없는 짓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내가 이러한 사실을 알아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2초소 근무설 때 최병장이 나한테 해 준 얘기가 맞았다.
'그런 얘기 너무 믿지마라. 믿으면 믿을수록 너만 피곤해진다.'
나는 그제서야 조금 안정을 되찾는 듯 했다.
그리고 나는 이강수에게 진지하게 충고했다.
"너 이 말 잘들어. 너 살고 싶으면 그 입 다물어라. 내일 영창갔던 김병장 돌아온다.
윤상병의 윤자만 꺼내도 넌 김병장의 칼에 맞아 죽을 수 있다."
다음 날 오후 김병장이 나타났다.
모두들 어떻게 그를 맞이해야 할지 몰라했다.
말년 고참들이 고생했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그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지나치게 초췌해진 그의 모습은 보통의 15일 영창을 갔다 온 군인의 모습으로 보긴 힘들었다.
양 옆으로 쫙 찢어진 눈꼬리가 쳐진 듯이 보였고, 돌출된 앞니를 감추려는 듯 입은 굳게 다물고 있었다.
한 동안 햇빛을 못 봤을 텐데도 그의 얼굴은 더 검어진 것 같았고, 핼쑥해진 얼굴은 그가 굉장히 무언가에 시달렸음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대대장에게 복귀 신고를 하는 내내 그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내무반에 들어온 뒤로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고참이고, 후임병이고 오로지 그의 눈치만 살피는 분위기였다.
저녁 식사를 했는지 안했는지 내가 식판을 모두 닦고 내무반에 들어왔을 때까지
그는 내무반 구석에서 침낭을 뒤집어 쓰고 조용히 웅크리고 옆으로 누워 있었다.
당직사관인 선임하사도 오늘만큼은 모른 채 넘어가고 싶어했는지, 그 모습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
저녁 9시 반, 점호시간에도 김병장은 일어나지 않았다.
간단히 점호를 끝낸 선임하사는 고참들에게 김병장을 잘 살피라고 지시했다.
선임하사가 내무반을 떠난 후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내무반에 감돌았다.
'이 씨발새끼가. 영창 갔다온게 무슨 자랑이냐?' 이러면서 성깔 사나운 고참이 싸움이라도 붙일 것 같았다.
모두 자고 있는데 저 미친 김병장이 갑자기 일어나 총이라도 난사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모두들 마음속으로 감추고 있지만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작은 불똥 하나만 튀어도 엄청난 폭발이 일어날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팽팽했던 긴장감은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새벽 3시 쯤.... 난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이 깼다.
불침번과 김병장이 내무반 구석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것이다.
"잘 들어봐.....들리잖아......"
김병장이 울먹이며 매달리듯이 불침번을 잡고 설득했다.
"김병장님. 왜 그러십니까 정신차리십시오."
"왜? 안들려? 저기 잘 들어봐... 윤상병 그 새끼 끙끙 앓고 있잖아!!!"
이미 전 부대원들이 잠에게 깨어나 버렸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향하자 갑자기 김병장은 기겁을 하며 우리에게 쏘아붙였다.
"다 들 왜 그래? 내가 미쳐 보여? 이 씨발놈들.. 윤상병 가지고 장난치는거지?"
"저 새끼 왜 저래? 영창 갔다왔으면 정신을 차려야지 미친새꺄!!"
고참들의 욕설에 김병장은 아무도 말릴 틈도 주지 않고 외곽 근무를 준비하고 있던 근무자의 총을 재빨리 빼앗았다.
그리고 우리 쪽을 겨누더니 외쳤다.
"이 개새끼들!! 나 가지고 노는거야. 그치? 이 나쁜새끼들!! 다 죽여버리겠어."
김병장이 쥔 총은 빈 총이다. 탄창은 근무신고 후 행정반에서 지급받기 때문이다.
"너 씨발새끼, 지금 뭐하는거야?"
말년 고참 한 명이 거친 욕설을 내뱉았다.
그러나 김병장은 개의치 않고 계속 울부짖었다.
"이 씨발놈들. 다 죽여버릴거야. 니들 다 윤ㅇㅇ하고 한 통속이지? 개새끼들!!!!!!"
"저 새끼 총 뺏어!!"
말년 고참들의 명령에 부대원들이 원을 두르 듯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김병장은 벽을 등지고 총을 이리저리 마구 휘두르며 부대원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래.. 이 씨발놈들...다 덤벼. 모두 다 싸그리 죽여줄테니까....."
그의 벌겋게 충혈된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다가갔다가는 휘두르는 총기에 머리에 구멍이라도 날 듯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상황이 펼쳐졌다.
김병장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이강수를 향해 총을 겨누며, 두 손을 부르르 떨며 울부짖었다.
"윤ㅇㅇ... 저리 가 씨발놈아.... 이제 좀 내버려둬..... 저리 가라고 이 개새끼야!!!!!!!!"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며 김병장은 이강수가 있는 쪽을 향해 총을 마구 휘둘렀다.
우리는 순간 멍하니 그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뒤이어 다시는 평생에 보기 힘든 엽기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갑자기 이강수의 코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다.
"강수야...."
우리의 걱정은 곧 끔찍한 두려움으로 변하였다.
코피를 흘리던 이강수가 씩 미소를 짓더니 성난 고양이처럼 양손을 들어올리고 손톱을 치켜세우며, 입을 쩍 벌리고 김병장에게 달려드는 것이다.
"칵!!!!!!!!!!!!!"
짐승의 소리였다. 그 순간만큼은 이강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달려드는 순간 김병장이 휘두른 소총의 개머리판에 오른쪽 어깨를 강타당했음에도
이강수는 개의치 않고 김병장을 엄청난 힘으로 벽에 밀어붙였다. 그리고 뒤엉켜 육박전을 펼쳤다.
놀란 부대원들이 급히 달려들어 뜯어말렸으나 그 조그만 체격에서 어떻게 그 엄청난 힘이 나오는지
이강수는 부대원들을 한 두차례 뿌리치고는 김병장을 넘어뜨렸다.
그리고 김병장의 총기에 수 차례 온 몸을 난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병장이 넘어짐과 동시에 그의 가슴 근육을 물어버렸다.
"아악!!!"
김병장의 소름끼치는 비명 소리가 내무반에 울려퍼졌다.
모두들 경악스런 장면에 움찔해 있는 사이 갑자기 여자같은 괴기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해!!! 씨발년아!!!"
순식간에 달려든 고장포 병장이 이강수를 잡아 힘껏 뿌리쳤다.
침상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이강수는 달려든 부대원들에게 곧바로 제압당하였다.
"이제... 그만해 씨발..... 이제 정신차리고 살아보자...."
고장포 병장은 이전 부대에서 받았던 천대를 피해 도망치듯 우리 부대로 왔던 사람이다.
그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그 험상궂은 얼굴에서 연신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하라고 씨발......"
뒤 늦게 달려 온 선임하사 어찌 된 영문인지 살피고 있었다.
이강수는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된 상태로 으르렁거리고 있었고, 김병장은 가슴을 움켜쥐고 신음을 하고 있었다.
"저 두 놈 빨리 침상에 눕히고 꼼짝 못하도록 잡고 있어!!"
우리는 형사가 범인을 체포할 때 사용하는 방법처럼 김병장과 이강수를 엎드리게 한 후 손을 뒤로 잡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였다.
선임하사는 행정반으로 고참들을 불러 상황을 다시 파악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강수의 팔을 잡고 그가 움직일 수 없도록 최대한 힘을 주어 몸을 고정시켰다.
그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온 핏물이 매트리스를 벌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제압당한 두 사람의 헉헉대는 숨소리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고장포병장은 내무반 구석에서 훌쩍훌쩍 대며 넋 나간 사람처럼 쪼그려 앉아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난 지금 내가 무엇을 봤으며, 무엇을 겪었으며,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머리 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나머지 부대원들도 우두커니 서서 지금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 답을 찾지 못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후 선임하사가 다시 내무반에 들어와 부대원들에게 말을 했다.
"지금 대대장님에게 다녀올 테니까, 외곽근무 제대로 돌리고 저 두 놈은 저대로 꼼짝 못하게 잡고 있어."
선임하사는 운전병과 함께 급히 내무반을 빠져나갔다.
선임하사가 빠져 나간 후 얼마 동안 모두들 공황상태에 빠진 것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며 머리를 움켜 쥐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여기저기서 고참들의 탄식소리가 들려왔다.
"아.. 씨발 부대 해체되겠네. 씨발 좆같은 병신새끼들만 들어와가지고..."
기존 부대원 병장의 원망에 전입해 온 다른 병장이 맞대응하였다.
"뭐? 씨발놈아? 나도 이런 씨발 좆같은 부대에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뭐? 좆같은 부대? 이 씨발놈이 죽을려고.."
그러자 두 사람은 곧 죽이기라도 할 듯 자리에서 일어서 막말을 내뱉았다.
"다 들 조용 안해?"
말년 고참의 고함소리에 한 동안 씩씩거리던 그들은 곧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았다.
두려움이 물밀 듯 밀려왓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이 부대를 탈출하고 싶었다.
선임하사가 나간 지 벌써 한 시간이 넘었다.
몇몇 고참들은 행정반으로 가서 얘기를 나누고 있고, 몇몇 고참들은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며 들어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직 내무반에는 졸병들만 잠들지 못하고 마냥 다음에 벌어질 일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날이 샐 듯한 분위기였다.
이 와중에 이 사태의 주범인 김병장은 피곤한 지 부대원에게 제압당한 그 자세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런데 여전히 이강수는 엎드린 자세로 계속 가는 숨소리를 내며, 눈을 뜨고 있었다.
나는 이미 그의 팔에서 힘을 풀었다. 관물대에 등을 기댄 채로 졸음만을 쫓고 있었다.
"크크큭.. 김ㅇㅇ. 일병님?"
그는 간신히 호흡을 유지하며, 기침인지 씩씩거리는 건지 정체모를 소리를 내며 작은소리로 나를 불렀다.
"조용히 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그러나 여전히 이강수 이 자식은 내 말을 무시하는 버릇은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제가 왜 코피를 흘리는지 아십니까?"
"이 자식 무슨 말 하는거야?"
옆에서 같이 이강수의 팔을 잡고 있었던 일병 고참이 나에게 물었다.
그러나 이강수는 누구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냥 말을 이어갔다.
"혼령이... 크큭... 사람 몸에 들어오려고 하면.. 어떤 사람은 기절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차거운 기운을 느끼고 기를 발산해 쫓아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혼령에 정복당해 다른 인격체로 변하기도 합니다.. 크큭.."
나는 아무 말없이 그냥 그의 말을 경청했다.
"저는 코피를 흘립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크크크크크.."
나와같이 이강수의 팔을 잡고 있었던 일병 고참이 뭔 말이냐는 듯 내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얼굴을 매트리스에 옆으로 처박고 큭큭거리며 웃는 그의 모습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어느샌가 시간은 새벽 6시가 되었다.
이젠 모두가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밖은 아직도 어둠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몇몇 고참들은 내무반으로 들어와 침낭을 뒤집어 쓰고 꼼짝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위병소에서 큰 경례소리가 들렸다. 대대장이 온 것이다.
어느 틈엔가 모든 부대원들이 먹이감에 몰려드는 바퀴벌레처럼 어디선가 나타나 내무반을 꽉 채우고 차렷자세로 대대장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그 사이에 제압당한 김병장도 잠에서 깨어 났는지 이제 나를 놔주라며 하소연을 했다.
나 또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지금의 자세를 유지하다가 대대장이 내무반에 들어오고 나서야 자세를 풀었다.
몇 번의 예를 갖추는 경례가 끝나자 대대장은 딱 한마디 말만 남기고 CP로 향했다.
"두 사람 1호차에 태워"
대대장은 모든 것을 결심하고, 모든 것을 준비해 놓은 것 같았다.
우리는 두 사람을 부축하고 1호차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강수는 생각보다 심하게 다친 것 같았다.
다리는 절뚝거리고 있었고, 오른쪽 팔에 거의 힘을 못주고 시체처럼 팔을 늘어뜨렸다.
1호차에 선탑자로 중대장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 바로 어디론가 가려고 하나보다.
왠지 지금 이들을 떠나 보내면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강수도 그 걸 알았는지 나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김일병님...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제 얘기 들어줘서... 흐흐흐.."
말라붙은 피떡으로 범벅된 얼굴로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얼굴의 핏물이나 닦아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켁켁... 절대로 저 뒷산에 혼자 가지 마십시요. 알겠죠?"
"이 씨발놈... 군대에서 '요'라는 말 쓰게 돼 있어? 절대로 혼자 안 갈테니까 걱정 마."
아... 씨발..이 미친새끼한테 정이 들어버린 것 같다.
사회에서 만났다면 어쩌면 친한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좆같은 군대에 와서 너나 나나 이게 뭔 개고생이냐?
나도 모르게 속에서 북받쳐 오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들을 차에 태우자 기다렸다는 듯이 1호차는 떠나버렸다.
저 멀리서 해가 뜨려는지 서서히 밝은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떠나가는 1호차를 잠시 동안 바라보며 몇 가지 생각에 잠겼다.
오늘부터 내가 식판을 닦을 때 내 옆에 이강수가 없을거라는 것과 부대에 큰 바람이 불어올거라는 것이었다.
날이 너무나 추워졌다.
나도 모르게 콧물이 흘러내렸다. 어린 아이처럼 나는 콧물을 손으로 훔쳤다.
내무반에 들어가서야 그것이 코피라는 걸 알았지만 나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나는 이강수가 아니니까. 단지 난 피곤할 뿐이다.
그 후 나는 그들이 헌병대를 거쳐 의무대로 갔다는 얘기까지만 전해 들었다.
그들이 다른 부대로 갔는지 아니면 입원하였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예감처럼 다시는 그들을 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