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K대 생이다. K대생은 반드시 술과 친해야만 하는 숙명 같은걸 짊어지고 입학을 하게 된다.
1학년 때는 정말인지 인근의 여대간 친구를 만나면 그 친구가 [ 너 요즘 술로 원 푸드 다이어트 하냐?]고 물어올 정도로 매일이 술이었다.
꺼리도 많았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이유로 술을 마시고 또 마시고...
그러다보니 알코홀릭의 증상까지 보이는 애들도 여럿있었다. 나는 이미 중딩 때부터 약주삼아 한 두 잔 씩을 꾸준히 복용해오던 술이라 그나마 술자리에 강한 여자신입생이었고 고로 주당선배들의 귀염을 독차지했다.
생일 땐 과대표에게 참이슬 한 병과 긴 빨대를 선물 받기도 했다.
내가 생각해도 그때의 나는 정말...최고(의 간 기능)였다.
내가 1학년 일 때 같은 과 3학년에 젠틀맨이라는 별명을 가진 남자선배가 있었다.
이 선배는 그야말로 젠틀맨이었다. 그 선배는 돌계단을 끝없이 올라가야 현관이 나오는 성북동 부잣집 아들이란 소문이 있었다.(사실인지는 지금도 모름)
게다가 색소부족증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하얗고 깨끗한 얼굴에, 외모에 잘 어울리지 않는
남자다움까지 겸비해 있었다.
하지만 그 선배의 매력은 그런것보단 술자리에서 빛이 났다.
유독 술자리가 잦은 우리과에서 함께 자리하는 때마다 그 선배는 동기들 챙기랴 후배들 챙기랴
안주 시키랴 계산하랴 차 갖고 온 사람 대리 불러주고 집 먼 사람 택시 태워주고 여자후배들
집 잘 들어갔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하여간 술자리 끝까지 정신 차리고 자리지키며 모든 사람을
다 잘 돌보는 선배였다.
엠티 같은걸 갔을 땐 더 좋았다.
정신 놓고 구토까지 하는 친구들이 있으면 그 뒤처리를 다 도맡아서 했다.
여자애들 방에 들어가서 문단속하고 자는거까지 보고 술자리 정리하고 그 담날은 제일 일찍 일어나
해장꺼리까지 준비하는 그야말로 젠틀맨이었다.
여자후배들중엔 술자리 있을때 그 선배가 그 자리에 있나 없나를 미리 확인하고 그 선배가 낀 술자리면 자신도 거길 가고 그 선배가 불참이면 자신도 안가는 애들도 많았다.
나도 그 선배가 있는 자리면 왠지 더 편하게 맘 놓고 술을 마실수 있어서 은근히 그 선배가 함께
하길 바랬던적이 많았다. 나의 1학년은 술과 그 젠틀한 선배의 기억으로 홀몽홀몽 지나갔다.
그리고 내가 2학년이 되고 1학기를 마쳤을쯔음 4학년 1학기를 마친 그 젠틀맨 선배가 돌연 휴학을
해버렸다.
한 학기 마치면 졸업인데 휴학을 한것이 이상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 선배의 빈자리는 술자리에서 너무 크게 드러났다. 그야말로 불편한 나날이었다. 술을 끊으면 될것을..
공연히 휴학한 선배만 원망하며 시간은 지나갔고 1년이 지나고 2년..3년..4년..시간이 많이 흘렀고
나는 그사이 외국으로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학교도 졸업했다.
나이가 들자 당연히 술자리도 가볍게 끝나는 경우가 많아졌고 짧게 보았던 그 선배는 깨끗이 잊어버렸다. 술자리에서 가아끔 그 선배 잘 있을까 궁금해하는 정도였다.
직장인이 된 어느날 대학로쪽에서 친구를 만날일이 있어 근처 한 호프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퇴근후 바로 와서 저녁겸 한잔 하려고 했으므로 저녁 7시정도로 그리 늦진 않은 시간이였다.
근데 그 시간부터 구석테이블에 만취해 주절거리는 남자가 한 명 눈에 띄었다.
함께 있는 친구인듯 해 보이는 사람은 그만마셔, 왜이래, 라며 연신 그 사람을 다독이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술 한 잔 하면서도 구석테이블이 너무 신경이 쓰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왠지 익숙한 모습 익숙한 목소리...
아는 사람일 것 같은데 누군지 기억은 가물가물하고..그런 답답한 마음 때문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대화도 겉돌고 술자리는 금방 파할 수 밖에 없었다.
술집을 나와서 친구와 헤어지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중 불현듯 그 사람이 예전 그 젠틀맨 선배였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 선배면 뭐 어떤데...라는 생각과 그 젠틀하던 사람의 현주소가 왜 저케 되었는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한 두 마음이 나를 갈등시켰지만 내일이 토욜이라 출근 안해도 된다는 생각과 최근
다이어트로 4킬로를 감량해 자신감 만땅이었던 S라인(!?) 내 모습이 나를 다시 그 호프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호프에 들어서는데 구석자리에 앉아있던 그 선배와 눈이 딱 마주쳤다. 역시 그였다. 아까 함께 있던 사람은 보이질 않고 그 선배는 여전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성큼성큼 그 선배에게 다가가 앉았다. 취해서 그런지 그 선배는 놀라지도 않았다.
나는 내 소개를 뻘쭘하게 했다. [기억하시겠냐]고 [술맞짱 **학번 챔피언 xx이라고...
그 동안 잘 지내셨냐고 뵙고 싶었노라]고 인사를 했다.
그 선배는 잠깐 생각하는 척했지만 역시 기억하지 못한둣했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함께 2차 가자는 내 의견엔 동의했다. 근처에 있던 지하 깔끔해 보이는 호프로 자리를 옮겼다.
반가운 마음에 술잔을 앞에 두고 앉긴했지만 사실 4년만에 만나서 단 둘이 술 마실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녔던터라 할말이 딱히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냥 갑자기 궁금해진것처럼 나는 물었다.
[선배 예전의 그 젠틀함에 반했었다..이렇게 취하신거 처음본다. 젠틀맨 술 취해 무너지는거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보게 돼서 좋다]고 그렇게 말했다.
선배는 빙그레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학번 xx너 입 무겁냐?] 라고[입 무거운걸론 대한민국
여자부 첫째]라고..술도 약간 오르고 하니까 뭔지 모를 선배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남은 을 휙 들이키더니 선배가 입을뗏다.
이제부터는 선배의 이야기,..
[나게는 아주 아주 친한 친구가 한명 있어.
중 학교도 고등학교도 함께 다녔지만 집도 근처라 이웃이기도 했지.
그리고 취미도 비슷하고 전공하고 싶은것도 같아서 같이 K대 @@과를 진학하기로 정해놓고 있었었지.
근데 안타깝게도 나는 붙고 이놈은 떨어진거야.
그 친구는 K대보다 한서열정도 낮은 H대의 @@과에 합격을 했어.
그래서 나는 K대로 친구는 H대로 입학을 했지.
그렇게 각자 대학을 가고 중간고사를 보고 하면서 그 친구와 자연히 연락이 뜸해졌어.
그러던 어느날, 아마도 1학기 종강할 무렵쯤에 H대에 간 다른 친구B군에게 그 친구 소식을 우연찮게 듣게 된거야.
이 친구가 입학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자퇴를 하고 군대를 갔다는거야.
벌써 군대간지 꽤 되었고 다음주에는 100일휴가를 나온다는거야.
부대는 서산 어디께에 있는 $$부대이고, 잘 다니던 학교 자퇴한 아들 부모님이 예뻐할리 없어 휴가
나와도 찬밥일거라고 그러니 내가 휴가 나오면 잘 놀아줘야 한다고 B군이 전해주더군.
그래도 제일 친한 친구였는데 미안하더군.
우리둘은 고딩때 성적도 비슷비슷했는데 나만 붙고 자긴 떨어졌으니 왠지 그 친구가 자퇴한것이 내 탓도 있을거같아서 죄책감도 들고 하여간 머리가 복잡했었어.
그래서 난 한가지 계획을 세웠어. 아무도 모르게 그 친구 휴가나오는 날과 시간에 그 친구 부대앞에서 기다리고 있기로.
그리고 그 친구 나오자마자 내차에 태우고 휴가기간 내내 여행하며 잘 놀아주기로...
버지를 설득해 차도 빌려놓고 내부 외부 잘 닦아놓고 현금도 챙겨놓고 나는 서산에 있는 부대로 차를 몰았어. 초행길임을 감안해 휴가나오기 전날저녁에 출발을했어.
일찍도착하면 차에서 잠을 자게 되더라도, 나오는 친구를 놓쳐선 안된다는 생각에 나는 부지런히 차를 몰았어. 네비게이션같은게 없던때라 지도를 찾아가며 가다 쉬다를 반복하고 있는데 날은 어둡고 비도 많이 내리던터라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고. 게다가 뭔놈의 부대가 그리 굽이굽이 산속에 있는지, 이 지도가 맞긴 한건지 10M 앞도 잘 안보이는 산길을 새벽에 혼자 달리고 있으니 겁도 나더라고.
가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낙석주의를 하라는 표지판이 보였어. 비가 많이 오고있고 가파른 산길을 깎아 만든 길인지 진짜 좌로 우로 돌맹이들이 굴러떨어지는거야.
위험한 정도는 아녔지만 차에 맞으면 긁힐정도는 되어보여 좌우를 보며 이리저리 핸들을 조작하고 있는데 갑자기 쿵! 뭔가를 친거였어. 나는 얼른 차에서 내렸지.
남자였어.
내가 80킬로 정도로 달렸으니 즉사였어. 그래 사람을 죽였어. 흔들어봤지만 이미 확실히 죽어있었어.
왜 이사람은 비가퍼붓는 이런때에 인가도 없는 이런 산속을 혼자 걷고있었을까.
난 그 사람이, 이런 폭우가, 낙석들이..모든게 너무나 원망스럽고 무서웠어.
나는 차에 타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생각을했어.
난 이제 겨우 스물 한 살이고 대학교를 갓 입학했고 하고 싶은일도 많은데...
인도와 차도가 구분이 되어있지 않은 이런길이 나쁜거지. 차를 보고 피하지 않은 저 사람이 잘못인거지..나는 낙석을 피하려다 사람을 못 본거 뿐이지..난 살인을 할 생각따윈 애초에 없었잖아 라는 생각이 들면서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고 있었어.
내가 여기 온건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과 운전 조심하라시던 아버지 얼굴이 떠올라 내가 신속한 결정을 하게 도왔어. 나는 시체를 피해서 열심히 달렸어.
그렇게 한 5분을 달렸을때까지 앞 뒤 옆 어디도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더군. 그러다가 갑작스레 스쳐가는 생각이 내가 여기 오기전 차 외부 청소를 할때 앞 부분이 약간 까진것이 눈에 띄어 카센타 형이 차 앞부분을 도색해준것이 생각난거야.
아직 도료가 채 마르지도 않았을테고 비도 많이 온터라 분명히 그 사람옷에 묻었을꺼란 생각이 들었어.
나는 차를 돌렸어.
머리카락이 쭈뼛서도록 무서웠지만 난 없었던일이 될 수 만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기세였으니...그
자리에 가보니 당연한 얘기지만 그 사람이 그대로 누워있더군.
나는 장갑을 끼고 옷을 벗겼어. 하나 하나 속옷만 남기고 다 벗겼어.
그리고 옷을 챙긴채 시체는 다시 그곳에 두고 다시 차를 달리기 시작했어.
비는 계속 많이 내려 내 발자국과 핏자국을 다 씻겨 내려가게 했고 나는 그 길로 서울로 올라가 옷을 불태우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태를 지켜보았지.
그런 사고가 많아서인지 그 사건이 뉴스에 나긴했지만 별로 이야기꺼리가 되지도 않았고 나는 어떠한 위협도 느끼질 않았어.
하지만 눈을 감으면 그 사람의 하얀 피부가 아른거리는거야. 꿈을꾸면 내가 옷을 벗기는걸 또 다른 내가 보고 있는거야.
술에 취한날은 살려달라는 도와달라는 환청까지 들리는거야. 나는 이러다 내가 폐인이 될거같은 공포심을느꼈지 그래서 그때부터 더 착실히 살기 시작했지.
친절하고 젠틀하게 행동했어. 외부적으로 보면 나는 정말 훌륭한 인격을 가진듯이 보였겠지 실제론 더러운 겁쟁이에 살인자인데. 술자리에선 더했어.
술마시면 맘이 약해지고 편해지고픈 마음이 들어 실언이라도 할까봐서 항상 긴장하고 주변을 챙기고 정신을 잡고 놓질 않았지. 취하지도 않고 기대지도 않고 엉덩이도 붙이지 않을려고 노력했어.
그렇다고 술자리같은데 어울리지않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않고 그러면 정말 폐인이 될까봐 나는
언제나 너무 힘들었어. 물론 아무도 몰랐겠지만. 4학년이 되고 군대도 다녀오고...
휴..이젠 다시 복학도 해야되겠지 .그럼 졸업도 하게 될꺼고. ]
선배의 얘긴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너무 황당한 이야기에 술이 다 깨버렸다.
하지만 쉽게 믿을수 있는 얘긴 아니었기에 나는 다시 물었다.
[말도 안돼요..그래서 그렇게 젠틀했던 거라구요? 그럼 오늘은 왜케 취한건데요?
글구 그게 다 사실이라면 지금 와서 왜이런 얘기를 하는건데요?]
[응 오늘이 그 사건 시효가 끝난날이야. 나 자수해도 아무 의미없는 일이 된 날이야.]
[....]
이런저런걸 더 묻고 싶었지만 항상 젠틀하고 진지했던 선배모습이 떠 올라 슬프기도 했다.
난 집에 들어와서 잠도 안오고 기분도 묘해서 인터넷에 접속을했다. 그리곤 7년전 뉴스를 뒤지기 시작했다. 지방신분도 빠짐없이... 선배의 말은 사실이었다.
서산 $$부대 인근 산속에서 뺑소니로 추정되는 사체 발견. 특이점은 사체의 옷이 모두 벗겨져 알몸으로 발견되었고 폭우가 심한 밤이었던터라 사체에서 그 어떤 증거물도 발견되지 않아 범인 검거에 어려움을겪고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그날 나는 선배의 연락처를 받지 않아두었다. 지금은 후회한다.
내가 이 얘기를 글로 쓰는 것은 이젠 시효도 만료되어버린 그 사건으로 아직도 괴로움에 힘들어하는 그 선배가 자꾸 마음에 걸려서이다.
벌은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므로 그 선배에게 동정이 간다.
오히려 빗속에서 덜덜 떨며 피 묻은 시체의 옷을 벋겼을 스물한살 어린 선배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좋질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