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 11분의 전화-2
Yeul
2011.07.17 14:59:08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전화가 걸려온 지 세 달 무렵 지났을 때에는 공포심마저 무뎌져 있었다. 그것은 강도가 변하지 않는 공포에 대한 면역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여자친구와의 불화가 더 큰 이유였다.
사실 나는 아직도 그 때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녀는 내 처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해 주고 있었고, 내가 힘을 낼 수 있도록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그 전화가 와도, 그녀는 웃으며 받으라고 말하곤 했다. 그녀가 곁에 있어 준 덕에 괜스레 용기가 솟아난 나는, 휴대폰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거나 평소라면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상스러운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여자친구는 너무 심한 것 아니냐며 다그치기도 했지만, 표정이나 말투로 보아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닌 듯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휴대폰을 방에 두고 편의점에 간 동안에 전화가 걸려왔던 모양이다. 그녀는 호기심에 전화를 받았을 터였다. 아무 것도 모르고 집에 돌아오던 나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여자친구와 마주쳤다. 그녀는 몹시 혼란스런 표정이었다. 무언가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순간적으로 계단을 마저 내려가려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마치 절벽에서 붙잡기라도 한 듯, 오른팔에 강한 하중이 실렸다. 바닥에 구두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지극히 당연한 내 질문과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혼란은 금세 분노로 변했다.
"무슨 일이냐고? 너 진짜 웃긴다? 나 갖고 놀면서 이때까지 재밌었어?"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아까 전화 받았어. 울기만 했다고? 웃기고 있네. 그년이 너랑 사귄 지 세 달 됐다 그러더라?"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내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 한 마디 없던 수화기 너머의 그 여자가 대답했다니. 게다가 그 내용이란, 도대체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다.
"잠시만, 일단 진정해 봐."
"진정은 무슨 진정이야!"
여자친구가 바락 소리를 지르며 내 손을 뿌리친 덕에, 그녀를 위해서 사 온 만 원 어치의 과자와 음료수들이 몽땅 쏟아졌다. 이쯤 되자 나도 화가 치밀었다.
'혼란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왜 내 말은 안 들어 주는 거야?'
그 다음 순간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마치 세상이 시간의 속도를 잃은 것처럼, 내 주먹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녀가 움찔 하며 계단 쪽으로 뒷걸음친 순간, 그녀가 신고 있던 7센티 하이힐의 오른쪽 굽이 부러졌다. 동공이 커지는 게 보였다. 그녀의 입술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움직였지만,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나에게 닿지 않는 손을 뻗은 채,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굴러 떨어졌다.
전치 12주의 중상을 입은 여자친구는 이미 나를 보는 눈이 달라져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문병을 갔을 때, 그녀는 증오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왜 왔어?"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진짜 오해야. 난-"
"듣고 싶지 않아. 가."
"아니, 들어. 들어줘."
"가라니까!!!"
그녀는 갑자기 과도를 집어 들고 자기 목에 들이댔다. 뻔한 협박이었지만, 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본 것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다음 날부터 가족을 제외한 다른 사람의 면회를 모두 거절한 것이다.
그 이후로는 내가 매일 밤 11시 11분에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다. 지긋지긋한 스토커의 통화를 피하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여자친구와 대화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자마자 끊어버렸다- 마치 내가 그랬듯이. 그리고 나는 나대로 계속 전화를 걸었다- 마치 그 스토커처럼. 며칠이 지나고 그녀가 착신을 거부하자, 이제 나는 11시 11분마다 공중전화로 뛰쳐나갔다. 그야말로 발악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 있는 모든 공중전화를 전전하고, 하나 남은 마지막 부스에서 여자친구와 겨우 통화한 것은 사고 이후 보름이 지나서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수화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웬일로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너지?"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제발 좀 들어줘. 넌 지금 오해하고 있어."
"아니, 오해 같은 건 없어."
멋대로 단정짓는 태도에 또 화가 나려는 나 자신을 가까스로 타이르는데, 그녀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사실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날 두고 바람을 폈다거나 해서 화가 난 것만은 아냐. 물론 화가 안 났다면 거짓말이지만…"
순간, 수화기 너머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수화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 그 날 사고 때문에 유산했어."
울음기는커녕 한 조각의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 때문에, 그녀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비로소 그 말을 이해했을 때,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 나는 그녀에게 따지다시피 물었다.
"언제부터? 언제부터였어?!"
"…10주 정도 됐었어."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당장 결혼하자고 하면 네가 곤란할 것 같아서, 좀 기다려 보려고 했어."
결국 그녀는 또 마음대로 단정을 지어버렸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 그녀의 결혼 요청은 절대 곤란할 리가 없었다. 뒤엉킨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그녀의 건조한 목소리 때문인지 울지는 않았다.
"…미안. 진짜 미안해. 한 번만 용서해 줘."
"아니, 용서 안 해줄 거야. 평생 널 증오하면서 살아갈 거야. 설령 너에 대한 사랑이 식는다 해도, 내 뱃속의 아기는 소중했어. 그 애는 한때나마 너와 내가 사랑했다는 증거였으니까. 그리고 그 애는 자기 아빠 때문에 죽었고, 이제 너랑 날 이어줄 건 아무 것도 없어- 이 핸드폰 번호 빼고. 뭐, 상관없어. 곧 바꿀 거거든. 난 너처럼 무른 사람이 아니니까… 그럼, 잘 있어."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반환구로 쏟아져 나오는 동전을 가져갈 생각도 없이, 나는 도망치듯 공중전화부스를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