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거기서 뭐해? 여기 더 볼 거 없다. 다른 데로 가자."
"벌써? 알았어."
모든 것은 타이밍의 문제였다. 나는 아파트 출입문이 열리고 놈이 막 안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녀석을 부르는 목소리의 타이밍을 말하는 것
이다. 열렸던 출입문이 닫히며 그 놈이 사라지자 끊어지기 일보 직전의 실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내 온몸의 신경세포는 일순간 녹은 젤
리처럼 흐물흐물하게 늘어지고 말았다. 그 짧은 순간 천국과 지옥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다 다시 문이 열리고 그놈
이 기어코 들어와 내게 등을 돌린 채 오줌을 누고 있었던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뭔가 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주변적인 것을 무의식
적으로 지나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놈이 아파트 출입문을 열고 복도로 들어왔을 때 분명히 녀석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도 놈은 마
치 나를 보지 못했다는 듯이 바지 지퍼를 내리고 복도 구석에서 소변을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석고상처럼 굳어서 꼼짝 못하고 있었던 나
도, 오줌을 누고 있던 녀석도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오줌을 누며 슬그머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녀석을 보며 나 역시 쥐고 있던 망
치를 찬찬히 들어올렸다. 이번에도 역시 타이밍의 문제였다. 그리고 내가 더 빨랐다. 쇠망치를 쥔 손에 묵직한 손맛이 느껴졌다.
바닥에 쓰러진 녀석의 머리통에서 피와 뇌수가 흥건하게 번져 나와 티셔츠를 적셨다. 놈은 자신이 누던 오줌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꼴사나
운 자세로 쓰러졌는데, 가관인 것은 놈의 방광에 축적된 여분의 오줌이 계속 흘러나와 바지를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
는 개의치 않고 녀석의 머리통이 으깬 감자처럼 잘게 부숴 질 때 까지 미치광이 같은 망치질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내 얼굴은 피와 뇌수
로 인해 번들번들 거리고 있었지만 그런 건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 녀석의 머리통은 절반쯤 남아 있었고, 나머지 절
반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잘게 조각이 난 상태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애써 억누르며 찬찬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태어나서 처
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생각보다 쉬웠다. 어쩌면 그래서 더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머리통이 박살난 오줌싸개 자식은 기묘한 자세로 누워 경
련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소변을 내뿜고 있었다. 녀석의 오줌 방울이 산발적으로 튀어 내 신발에 달라붙었다. 빌어먹을 오줌. 그제 서야 얼
마쯤 정신을 수습한 나는 욕설을 지껄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얼굴에 잔뜩 피 칠갑을 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신발에 묻은 오줌 파편에
만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오줌이 튄 부분을 바닥에 문질러 대충 닦아낸 후 고개를 들었을 때, 내 눈앞에는 웬 쇠파이프를 든 녀석이
고개를 죽 빼고 서서 죽은 녀석과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녀석은 내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멀뚱히 눈만 꿈뻑이고 있었다. 마치 ‘니가 이런거야?’라고 묻기라
도 하는 듯한 눈빛. 나는 대답대신 망치를 슬그머니 들어올렸다. 이윽고 쓰러진 녀석의 방광에서 오줌 줄기가 차츰 잦아들다가 이내 완전히
그쳤다. 우리는 마치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서로 들고 있던 무기를 휘둘렀다. 쇠파이프와 스패너
가 부딪치자 ‘까앙’ 하는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손이 떨어져 나갈 듯 저려왔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무기가 짧은 만큼 가까운 거
리에서는 내가 더 유리했다. 나는 즉시 왼손에 든 망치를 휘둘러 녀석의 옆구리에 한방 먹여주었다. 성공이다. 놈은 쇠파이프 대신 옆구리
를 부여잡고 쓰러져 비명 같은 신음소리를 흘려냈다. 맛이 어떠냐? 개새끼야. 나는 의기양양하게 서서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저 새끼 뭐야?”
“야이 씹새끼야. 너 일로와봐.”
두 번의 살인으로 인한 악마적인 쾌감에 도취되어 있던 나는 그만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놈들의 패거리가
10명이나 더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두 놈을 해치우면서 방심하는 사이에 녀석들도 나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남은
10명의 쇠파이프 집단이 나를 향해 우르르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등골이 서늘해져 옴을 느끼며 즉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십색기들,
입에 게거품을 물고 쫒아오는 모양새가 가관이다. 고작 나 하나를 잡기 위해 10명씩이나 뛰어오는 것을 보니 못난 놈의 새끼들이 분명하다.
그래도 상황적으로 봤을 때 잡히면 죽는 것만큼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특히, 나는 누구보다도 처참하게 죽을 거다. 이런 짓을 해버렸는데
곱게 죽일 리가 없었으니까.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달아나는 것에만 정신을 집중시켰다. 애초에 내려오는 게 아니었다. 내가
복수를 한다고 해서 죽은 어머니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뭣 하러 그랬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운석이 떨어지면 개나 소나 다 죽어버릴
판국에 왜 사서 수명을 단축시키려 하느냔 말이다.
“거기서 개새끼야.”
“서란다고 서는 병신이냐 내가?”
남들보다 특별히 운동신경이 뛰어나지도 않은 내가 단지 달리기만으로 놈들을 따돌린 다는 것은 애당초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
서 고이 잡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거나 살아날 방도를 찾아야했다. 몇 시간만 지나면 멸망해 버릴 코딱지만 한 행성에서 뭐 한다고
그렇게 아등바등 살려고 하는지 조금 회의적인 기분도 들었지만 그래도 쇠파이프에 맞아죽는 비참한 죽음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누구라도
그럴 거다. 마지막이 그렇게 초라하고 비참할 바에야 차라리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하는 게 백배는 깔끔한 죽음이다. 그리고 이왕 죽을 거면
지구의 최후라도 지켜보고 싶었다. 과연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스펙터클한 해일이 밀려와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인지 궁금했다. 당장이라
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는 녀석이 하기엔 조금 배부른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머릿속이 온통 운석, 죽음, 공포, 삶, 쇠파이프, 오줌
따위만으로 가득 찬 멍청이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나마 그 중에서 가장 필요악이라고 부를 만한 생각이라면 ‘어디로 도망치느냐’ 하는 정도였다. 나는 그 때 4층을 막 오르고 있었는데 그
순간 겨우 떠오른 생각이 잽싸게 집으로 들어가서 숨어버리는 거였다.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당연한 방법이었지만, 사실 이런 상황
에선 이 정도가 최선이다. 게다가 타이밍만 잘 맞으면 탁월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놈들이 알아채지 못할 만큼 빨리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그고 숨어 버린다면 내가 어느 집으로 들어갔는지 녀석들이 알게 뭔가? 그 부근의 집을 한 집씩 모두 뒤진다고 쳐도 날 발견할 때쯤
이면 이미 지구는 완전히 멸망하고 난 뒤일 것이다. 임기응변으로 떠올린 것 치고는 꽤나 적절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녀석들과의 거
리는 제법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차이를 벌릴 요량으로 단숨에 5층 계단을 뛰어 올랐다. 그런데 쉬지도 않고 복도로 들어서려는 순간
검은 그림자 하나가 눈앞을 가로 막는 것이다. 이런 씨부랄 어느새. 녀석들 중에는 ‘모리스 그린’보다 더 빠른 녀석이 있는 게 틀림없다. 나
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들고 있던 망치를 휘둘렀다.
‘텅’하며 두개골 깨지는 소리가 났다. 여인이 쓰러졌고,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던 꼬마는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끄아아아’ 괴상한 신음소리를 흘려대던 여인은 곧 힘없이 축 늘어져 버렸다. 방금 전에 계단을 내려가
면서 마주친 모자였다. 아까부터 괜히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찌질 대더니 결국 이 모양이다. 아, 씨발 일이 더럽게 꼬이는구나. 그러
는 동안에도 쇠파이프를 든 놈들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계단을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계단으로 통하는 비상구 문을 열고
그 틈으로 아이를 숨겨두었다. 어느새 녀석들 중에서도 걸음이 빠른 한 녀석이 거의 다 쫒아와 10계단 쯤 아래서 씩씩 거리고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스패너를 무작정 녀석에게 던졌는데 그게 운이 좋아서 숨을 고르던 녀석의 미간에 적중을 해버렸다. 놈이 구겨진 종이처럼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바로 뒤따라오던 녀석에게도 왼손에 든 망치를 집어던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놈은 쇠파이프를 절묘하게
틀어 망치를 막아내 버리는 것이었다. ‘깡’ 하는 마찰음과 함께 불꽃이 일었다. 놈이 말했다.
“내가 검도가 13단이다. 이 존만아.”
“좋겠다. 개새끼야.”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집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놈은 9명.
바로 코앞까지 뒤 쫒아온 녀석들의 숨소리가 목덜미에 와서 닿는 듯한 느낌이었다. 머리카락이 쭈뼛거리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쩌다 이
렇게 되어버린 걸까. 분명히 아침까지만 해도 난 평범한 복학준비생이었다. 그러나 이젠 살인자에 도망자에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게 되어버
린 애매모호한 멍청이가 되어버렸다. 쇠파이프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어깨를 스치며 날아갔다. ‘이런 두더지 같은 새끼’ 가장 앞에서 쫒아오
던 놈이 아깝다는 듯 지껄였다. 근데 왜 하고 많은 새끼들 중에 하필이면 두더지 새끼였을까? 괜히 궁금해졌다. 아무튼 가슴을 쓸어내리며
간신히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려 할 때 아슬아슬하게 문틈으로 다리 하나가 비집고 들어왔다.
“에이익. 개새끼야. 이 개새끼야.”
나는 문을 닫으려고 미친 듯이 발버둥 쳤지만 놈의 오른발은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지가 않았다. 이러다가 남은 놈들이 모
두 도착하면 난 끝장이다. 놈의 다리를 주먹으로 마구 내리 쳤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문틈으로 얼핏 보니 녀석의 얼굴엔 묘한 여유로움
마저 감돌고 있었다. 이대로 동료들을 기다리기만 하면 게임 끝이라는 심산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 못하던 나는 아까 망치와 스
패너를 꺼내다가 너무 작아서 신발장 근처에 아무렇게나 버려두었던 송곳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닿을 듯 말듯 하며 내 애간장
을 태우던 송곳이 간신히 손가락에 걸렸다. 금방이라도 열릴 듯 위태로운 문의 손잡이를 애써 부여잡은 채로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 녀석의
발등에 혼신의 힘을 다해 송곳을 찔러 넣었다.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발이 빠져나가자 나는 잽싸게 문을 닫았다. 잠금 장치를 걸어두고
삼켰던 숨을 모조리 토해내었다.
“헉, 헉... 씨발... 좆됐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엄청난 쇠파이프 질이 현관문을 부술 듯이 쏟아졌다. 이제 어떡하면 좋지? 나는 공구함으로 가서 되는 데로 연장을
챙기기 시작했다. 펜치, 중망치, 장도리, 드라이버, 송곳, 프라이, 대못 몇 개, 볼트, 너트... 오, 여기 좋은게 있다. 절단기. 나는 중망치와 장
도리를 허리춤에 차고, 송곳을 벨트에 끼워 두었다. 그리고 족히 일 미터는 되어 보이는 절단기를 들고 뭔가 더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없나
찾아보았다. 물론 아무리 많은 무기가 있어도 혼자서 놈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총이라도 있다면 모두 다 쏴 죽여 버리겠지만
그런 걸 기대할 수는 없잖은가? 기껏 가지고 있는 총이라고 해봐야 어릴 때 가지고 놀던 공기 압축식 물총이 전부였다.
그런대 물총을 떠올리는 순간 갑자기 눈이 따끔따끔 거리며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어렸을 때 동생이 쏜 물총에 얼굴을 얻어맞고 기절
했던 기억이 연쇄적으로 떠올랐던 탓이다. 동생은 이따금씩 무지에서 비롯된 잔인한 행동을 순진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하곤 했는데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이 물대신 락스를 집어넣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무것도 모른 채 락스물을 얼굴에 뒤집어쓰던 아찔한 기억이 섬
전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즉시 장롱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물총을 꺼내 들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세탁기 옆엔 섬유유연제와 합성세제, 옥시크린, 그리고
가장 뒤쪽에 락스까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물 대신 락스를 가득 채운 후 펌프질을 해서 공기를 잔뜩 압축시켰다. 이건 눈에 들어갔을 때
방치하면 자칫 실명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거다. 개새끼들 모조리 장님으로 만들어주마. 나는 물총을 목에 걸고, 동선을 고려해 적당한 곳
에 절단기를 세워두었다. 하지만 아직도 뭔가 불안하다. 와일드카드가 될 만한 뭔가를 찾아야만 한다. 저 빌어먹을 새끼들을 모조리 보내버
릴 수 있는 뭔가를. 불현듯 머릿속 한 구석에서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살면서 문제가 생길 때 마다 동생은 예상치 못한 방법으
로 해결책을 제시해 주곤 했다. 물론 녀석이 어떤 철학적 사유 끝에 내뱉은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동생의 말
한 마디가 절묘하게 상황과 부합하며 일종의 깨달음을 이끌어낸다는 데에 있어서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도 동생의 목소리가 구원의 종소리처럼 귓전을 울렸다.
‘내 책상서랍 3번째 칸에 15만원 넣어놨거든. 그거 쓰려면 써.’
에이 병신 같은 새끼.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게 결정적인 순간엔 이렇게 꼭 초를 쳐버린다. 그렇다고 놈들에게 15만원을 주면서 ‘오늘은 이
정도 밖에 줄 수 없어. 그러니 이쯤하고 돌아가.’라고 말할 순 없잖은가? 쓸데없는 망상에 가지가 뻗치는 동안에도 종잇장처럼 구겨진 문은
금방이라도 열릴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쇠파이프 질에 기가 다 질려버릴 정도였다. 저런 걸맞으면 얼마나 아플까?
오금이 저려왔다. 죽도록 얻어 맞다보면 정말 다진 고기가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물론 그럴 수야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오감
을 모두 동원해서 집안을 샅샅이 훑던 내 시선은 가스밸브 위에서 멈췄다. 그래, 저거라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나는
절단기를 들고 가스렌지 앞에 섰다. 가스 밸브와 연결된 고무관을 잘라버리는 거다. 일이 잘못되면 모두 함께 죽을 수 있도록. 그게 아니라
도 최소한의 보험 역할을 해줄 것이다. 이런 미친 짓을 하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걸 보니 나도 미친게 틀림없다. 절단기의 날이 너무 무
뎌서 죽을똥, 살똥 안간힘을 쓰고 나서야 고무관을 자를 수가 있었다. 다 자르고 나니 싱크대 위에 걸린 가위가 비웃기라도 하듯 내 코앞에
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빌어먹을 가위새끼. 어쨌거나 작은 고무호스를 타고 천천히, 하지만 차곡차곡 역한 도시가스 냄새가 거실에 모이
기 시작했다.
이윽고 너덜너덜해진 문이 힘없이 열렸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들고 있던 물총으로 가장 앞서 들어오던 놈들의 얼굴에 락스를 퍼부어 주었다.
“죽어라, 이 개새끼들아.”
“으아악, 내 눈...”
“크하악... 뭐야 이거...”
락스 맛이 어떠냐? 하하, 병신새끼들. 꼴좋다. 녀석들이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있는 사이 뒤쪽에서 쇠파이프 하나가 빠르게 날아들었다. 그
리고 눈앞에서 별이 번쩍 하며 나는 쓰러지고 말았다. 어쩌면 몇 초쯤 기절이라도 했는지 모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왼쪽 눈이 보이지 않았
고, 놈들이 날 에워싼 채 비릿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한 녀석이 쇠파이프로 내 배를 내려찍었다.
“이 존만한 새끼.”
쿠억
그 한방으로 난 뱃속에 있는 것을 모조리 게워내야 했다. 물론 먹은게 없었던 지라 헛구역질만 몇 번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벌써 죽을 듯이
괴로워졌다. 나는 바닥을 북북 기며 달아나려 했지만 어림없다는 듯 내 등짝으로 다시 한 번 쇠파이프가 내리꽂혔다. 너무 아파서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눈앞으로 운동화 하나가 날아들었다. 제멋대로 고개가 돌아가더니 입안에서 딱딱한 것들이 핏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대
여섯 개의 이빨 조각이 초라하게 거실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낮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아
픈 줄도 잘 몰랐다. 뭐야, 겨우 이대로 죽는 건가? 나는 힘겹게 숨을 토해내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라이터가 만져진다.
이제 라이터의 줄날 바퀴를 가볍게 돌려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이 쇠로 된 회전체가 라이터 부싯돌이라 불리는 발화합금(세륨)과 마
찰을 일으키며, 화학적인 연소를 진행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면 찰나의 순간 생명을 얻은 불꽃이 거실에 가득 찬 도시가스와 만나면서 수천
억 배의 힘으로 나와 녀석들을 무자비하게 찢고, 발기고, 태워버리며, 결국 그 압도적인 힘 아래 모두가 굴복하게 될 것이다. 제 아무리 쇠
파이프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여기까지다. 이제 다 같이 죽는 거다. 하지만 너무 억울해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몇 시간 후면 사라질 행성이
니까. 라이터를 꺼내든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래도 쪽팔리니까 가급적 떨지는 말자. 엄지손가락을 슬며시 라이터에 얹어 놓으려는 순
간 낯익은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이런 개새끼들 당장 안 멈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