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녀의 방에 어서오세요 -3부-
지구별방랑자
2013.07.18 13:53:29
서둘러 집에 들어가 보니 집안에서 딱히 이상한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방을 둘러보며 혹시나 그녀가 어딘가에 남아 기다렸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소소한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혼자 사는 남자 집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듯 내 방도 지저분했다.
대충 던져놓은 휴지 조가리, 담배 껍데기, 생수병, 컴퓨터 앞 담배꽁초가 산을 이룬 재떨이.
사라진 물건 따윈 보이지 않았지만, 주변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었다.
텅텅 빈 재떨이 밑에 '다른 물건은 건드리지 않았어요.' 하는 메시지가 있었다.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손에 쥐고 있던 검정 비닐봉투 안에서 맥주가 식어가는 것이 떠올라 냉장고에 다가가니
'맥주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안에는 열댓 개의 맥주 캔과 과일이 몇 가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냉장고 가장자리에 사온 맥주를 대충 욱여넣으며 살살 기분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뒤돌아 대충 옷가지를 벗어 던지며 땅바닥에 널브러트렸다.
욕실 앞에는 '샴푸가 다 떨어졌어요.' 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씻으며 몸을 헹구는 동안 거울에 슬슬 김이 서렸다.
서린 김 사이로 무언가 어렴풋이 글자들이 보이는 것 같은데 잘 읽을 수가 없었다.
"뭐, 잘... 뭐지?"
물을 뚝뚝 떨구며 옷을 말려두는 건조대로 다가가자 옷가지가 전부 차곡차곡 개어져 있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내며 개인 빨래들을 주어 서랍장에 담으려는데 양말 더미에서 쪽지가 하나 툭
하며 떨어졌다. '이 양말 구멍 났어요.'
빨래 더미를 내려놓고 개인 양말을 펼쳐보니 정말로 뒤꿈치가 다 헤져서 구멍이나 있었다.
양말을 움켜쥐고 휴지통에 대충 던져 넣었다. 휴지통 가득하던 쓰레기들도 모두 사라졌다.
육포를 담을 접시를 씻으러 싱크대에 다가서니 그릇들이 전부 설거지 되어있었다.
'너무 오래 안 하시면 냄새나요. 오늘만 제가 할게요.'
그릇수납장에 쓰여있는 글을 읽으며 접시를 하나 집어 들었다.
육포를 조금 구워서 먹으려고 하는데 '과일 안주로 드시면 안 돼요?' 라는 글이 가스렌지 위에 붙어있었다.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와 맥주를 한 캔 집어들고 방에 들어가 TV 리모컨을 집어들었다.
'저희 집에서 보시던 드라마, 다운 받아놨어요.' 라는 TV 화면 위의 글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컴퓨터 책상에 앉아 컴퓨터에 전원을 넣었다.
전원이 켜지는 동안 책상에 붙어있는 책장을 슬쩍 들여다보자
내가 읽던 책에 '이 책 재미있네요.' 하는 글이 붙어있었다.
책을 꺼내 들고 펼쳐 보자, 확실히 내가 읽던 부분이 아닌 곳에 책갈피가 꽂혀 있었다.
'걱정 마세요. 혹시나 해서 원래 부분에도 책갈피 끼워 놓았어요.'
문득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어디에서 이 책을 읽었을까?
이 의자에 앉아서였을까? 내 침대 위에 편히 누워서 봤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 말고도 곳곳에 메시지들이 많이 붙어있었다.
창문틀 위엔 '환기 좀 시킬게요.', 선풍기 위엔 '이거 안 시원하네요.'
침대 머리맡에는 '베개 높은 거 쓰시네요.' 하는 글들이 있었다.
컴퓨터 안 혹시나 하며 야한 동영상을 담아둔 폴더를 찾아보니
'남자는 남자네요.' 라는 폴더가 새로 생성되어 있었다.
정지영. 그녀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녀에게 다가가서 무엇이든 함께 시작해보는 것은 어떠냐고 물어보고 싶어졌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매만졌다.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신발을 꺼내 드는데
또 현관 앞에 생각지도 못했던 메시지가 붙어있었다.
'걱정마세요. 이 이상은 다가서려고 하지 않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