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下
Yeul
2011.10.02 22:39:30
나는 뒤돌아 볼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분명히 사람의 비명소리였다. 그것도 아이의 비명소리다. 그렇다면 이것은 귀신의 소리란 말인가? 아니다. 아이의 목소리였다. 설마 아이가 귀신이겠는가? 그러나 이 시간에 아이가 왜 이런 어둠 속에 있단 말인가? 그렇다. 아이 귀신이라고 있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렇다면……
그 아이 귀신이 소문의 흡혈귀란 말인가!
그 순간 내 이성이 얼마나 나약했는지가 증명되었다. 고작 내린 결론이 이따위 바보 같은 것이었으니. 그러나 그러한 결론이 나온 후, 내 이성은 정전이라도 된 것처럼 까맣게 꺼져버렸다.
나는 덤벙덤벙 어둠을 짓밟으며 걸음을 빨리 했다. 이런 것이었나? 늦은 시간에 귀가를 했던 학생들과 젊은 여자들이 느꼈던 공포가…… 흡혈귀를 목격했다던 사람들의 심정이……
으아아……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발걸음을 늦출 수는 없었다. 누군가가 등뒤에 따라붙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아니라, '무언가'일 수도 있다.
별안간 습하고 비릿한 냄새가 났다. 뒤에서부터 공기를 타고 밀려오는 냄새였다.
이것이 귀신의 냄새인가…… 정말로 귀신이 날 쫓아 오고 있는 것인가……
문득 뒤돌아보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속삭이는 이는 바로 나였다. 아직 조금 남아 있던 이성의 목소리다. 희미하게 남은 이성은 나에게 뒤돌아 서서 그 무언가가 과연 무엇인지를 똑똑히 확인해 보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이렇게 너 스스로를 겁쟁이로 만들고 말거니? 아니잖아? 넌 겁쟁이가 아니잖아? 뒤돌아봐! 그리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란 말야. 소문에 당당히 종지부를 찍어 버려! 그리고 나약하고 멍청한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야단을 치는 거야. 당신들은 바보들이라고…… 한 움큼의 공포 앞에서도 쉽게 감정이 동하고, 머리를 숙여 버리는 의지의 박약아들이라고…… 정신차리라고 말야!'
그러나 이성의 속삭임은 신출내기 배우의 연기력처럼 내게 아무런 설득력과 감동을 주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갈등 따위는 원치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비스킷을 그냥 포기하고 짓밟아 버리듯 나는 희미하게 남아 있던 마지막 한 조각의 이성을 깨끗이 포기해 버렸다. 먼지를 털 듯 털어 버리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백 퍼센트 감정에 지배당해 버린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 보다 괜찮은 일이었다. 그것은 한가지 일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않고 그저 걷기만 했다. 이제 왔던 만큼만 더 가면 도로는 끝이 날 것이다. 도로 끝에는 밤새 불을 밝히고 있는 24시간 편의점도 있고, 만수가 근무하는 파출소도 있었다. 거기까지만 가면 다시 정상적인 패턴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감정에 몸을 맡겨도 좋으니 어서 이 도로를 벗어나기나 하자. 이성은 나중에 다시 되찾을 것이다.
하지만 등뒤에 무언가가 따라붙고 있다는 느낌은 도무지 지워지지가 않았다. 역한 악취도 여전히 어둠을 떠돌고 있었다.
으아아…… 소리가 또 들려왔다.
이번엔 또 뭔가……? 차 소리? 아니면…… ?
하지만 내 두뇌는 아무런 식별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그저 어깨를 움츠린 채,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다.
이번 소리는 다행히 자가용 소리였다.
그런데 자가용이 엄청난 속도로 내 곁을 질주할 무렵, 작은 손아귀가 오른쪽 발목을 꽉 붙잡는 느낌이 전해졌다.
"으아아……"
이번에는 내가 비명을 질렀다. 실로 오랜만에 내 비명소리를 들어보게 되었다. 내 비명은 결코 듣기가 좋은것은 아니었다. 지겹도록 투정을 부리는 노인네의 가래 끓는 목소리 같았다.
비명은 더 이상 안 지르기로 했다. 대신 두 다리를 껑충껑충 뛰며 기분 나쁜 감촉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그러나 결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왼발을 들어 그 작은 손을 마구 짓밟았다. 그러면서 나는 놀라고 있었다. 내 발목을 붙들고 있는 작은 손이 피투성이가 되어가고 있었기에…… 피가 흐르다니……!
발길질을 멈추고 그 작은 손등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둠 속에서도 피의 흐름을 똑똑히 감지 할 수 있었다. 피를 흘리고 있는 작은 손…… 그것은 귀신의 손이 아니다. 그저 아이의 작고 보드라운 손일 뿐이다.
피를 보자 사라졌던 이성이 다시금 머리를 쳐들었다.
"얘, 꼬마야! 정신 차려봐!"
아이는 도로변의 우거진 수풀에 몸을 숨긴 채 손만 내밀고 있었다. 작은 손아귀는 끝까지 내 바지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황급히 수풀 속에서 아이의 몸을 들어 올렸다. 아이의 몸은 고양이처럼 축 늘어졌다.
"꼬마야! 왜 그래? 정신차려봐!"
아이의 몸을 흔들면서 가슴에 귀를 갖다 댔다. 아직 미세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 때, 아이의 하얀 목덜미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이의 목에는 이빨 자국이 있었다. 어렸을 적에 흡혈귀 영화에서 수도 없이 보았던 검게 뚫린 흉측한 이빨 자국!
심장이 요동을 쳤다. 온 몸에 가시가 박힌 것 같은 전율이 몰려왔다.
아이의 핏기 없는 하얀 얼굴……
흡혈귀의 짓이다!
나는 또 한 번을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참았다. 잠잠한 어둠을 뒤흔들어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내가 걸어 왔던 어둠을 가만히 응시해 보았다. 별안간 어둠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둠은 나를 쳐다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낮은 소리로 웃기까지 했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기분이다. 어둠이 정말 나를 보고 웃는 것일까? 아니다. 나를 보고 웃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그 '무엇'이다.
지금까지 나를 쫓아 왔던 그 '무엇'!
흡혈귀!
흐흐흐흐흐흐……
웃음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리는 듯 했다. 비릿하고 역겨운 악취가 강하게 코끝을 자극했다.
아이를 두 손으로 번쩍 안고 럭비 선수처럼 뛰었다. 어둠은 계속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미친 듯이 뛰고 있었으나, 영원히 어둠을 벗어나지 못 할 것이라는 절망감이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숨통이 막혀왔다. 실상 어둠은 나를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칠흑 같은 어둠뿐이지 않는가!
내 몸은 위태롭게 기우뚱거렸으나 그럭저럭 잘 뛰고 있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아이와 함께 바닥에 처박혀서 데굴데굴 구를 것만 같은 조마조마함은 호흡이 가빠질수록 커져만 갔다. 뒤에서 다시 자동차 소린지, 비명소린지 알 수 없는 굉음이 들려왔다.
이어서 조롱하는 듯한 웃음소리도 귓가를 맴돌았다.
으아아……
흐흐흐흐흐흐……
으아아아…… 앙……!
자동차가 한 대 지나갔다. 내 동공이 활짝 열렸다. 그것은 패트롤카였다.
"이것 봐요!"
나는 이미 실루엣만 보이는 패트롤카를 향해 뒤늦게 소리를 질렀다.
"도와주시오!"
소용없었다. 차는 이미 어둠이 삼켜버린 후였다.
한참을 뛰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헉헉거리며 주위를 살펴보니 드디어 도로는 끝이 나 있었다. 편의점과 주유소의 불빛이 보였다. 마침내 절대 암흑에서 벗어난 것이다.
아이의 몸에서는 아직도 온기가 느껴졌다. 편의점으로 들어가 도움을 청하려다가 발길을 돌렸다. 저 멀리 패트롤카가 보였던 것이다. 조금 전에 내 곁을 스쳐지나갔던 그 차였다.
나는 마지막 힘을 내어 파출소로 뛰어 들어갔다. 아이가 정신이 드는지 희미하게 신음소리를 냈다.
파출소에는 마침 만수가 근무하고 있었다. 만수는 내 모습을 보고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냐? 너 꼴이 왜 그래? 그 아인 뭐고……?"
나는 뭐라 말해야 할 지를 몰랐다. 만수에게 흡혈귀 얘기를 꺼내려니 내 꼴이 좀 우스워 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주저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흡혈귀야! 정말 흡혈귀가 있다고!"
"뭐?"
나는 파출소의 딱딱한 소파에 아이를 내려놓았다. 아이는 괴로운 듯 신음소리를 계속 냈다. 나는 문득 미간을 찌푸리며 파출소 안을 두리번댔다. 파출소 안에는 침침한 붉은 색 미등이 켜져 있었다. 야간이라 이런 불을 켜 둔 건가?
만수가 심각한 얼굴로 다가와 아이의 목덜미를 살폈다. 그는 이내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 정말 흡혈귀가 있는지 확인해 보려고 그 도로를 걸었던 거야?"
만수의 목소리가 왠지 따지는 듯 했다.
나는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어서 병원에 연락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만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고갯짓만 계속 해댔다.
"만수야! 어서 연락을 하라니까!"
나는 재촉했다. 그러나 만수는 전화기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는 놈이야……"
그는 이상한 말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디 할 일이 없어서 그런 것을 확인하려고 하냐…… 어?"
"만수야!"
"그래, 흡혈귀는 만나 봤어?"
"뭐?"
만수의 얼굴은 어느새 무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무표정한 만수의 얼굴은 거대한 바윗돌처럼 위압적으로 보였다. 비로소 파출소 안의 공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와 동시에 코끝을 자극하는 희미한 악취가 느껴졌다. 이 악취가 여기까지……
별안간 만수의 뒤로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문틈 사이로 한쪽 눈알이 보였다. 안에 누군가가 있다!
"허억!"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확실히 장담할 수 있는데 그 눈알은 사람의 눈알이 아니었다.
눈 아래로 뾰족한 콧날과 찢어진 입술도 보였다. 입술은 유난히 붉었다.
만수가 다가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뼈가 으스러질 듯 아팠다. 그러나 비명을 지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인상조차 함부로 구겨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그저 구원을 바라는 죄수 같은 표정으로 만수를 힘없이 쳐다봤다.
만수가 위협하듯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조용히 말했다.
"기회를 줄게. 소문의 진상을 밝히려고 하지 마! 소문은 소문으로 남겨둬! 자정이 넘으면 도로변에서 흡혈귀가 출몰하고, 사람들이 간혹 사라지는 이유는 흡혈귀 때문이야! 알겠니?"
내 고개가 마법에라도 걸린 듯 저절로 끄덕여졌다.
"이 아이도 이제 행방불명이 될 거야! 그럼 왜 사라졌지?"
"흡혈귀 때문에…… "
나는 착실한 학생처럼 대답을 했다.
"바로 그거야! 이 동네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믿고 있어. 이제 너까지 포함되는 거지."
만수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결국 네 말이 죄다 틀린 거지?"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다. 내 말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동네에서 사람들이 사라지는 이유는 흡혈귀 때문이다. 그것보다 더 근사하고 설득력 있는 이유란 있을 수 없다. 이성이 나약하지 않은 사람도 흡혈귀를 볼 수 있다. 흡혈귀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흡혈귀가 출몰하는 그 길거리는 충분히 문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내부가 아닌 외부의 문제인 것이다. 이 공포 앞에서 이성 따윈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둠이 깔리면 흡혈귀가 나타난다는 소문은 지금도 그 거리를 지배하고 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들 그렇게 믿고 있으며, 나도 분명히 믿고 있다.
출처 : 붉은 벽돌 무당집 작가 : 폭풍이야기 님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