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력좋게 쓴 재미있는 글이고 공감도 되고 글쓴이 시선도 따뜻해보여서 퍼왔는데 반응이 이렇게 좋을줄은 몰랐네요 ㅋㅋ
외전도 있길래 퍼왔습니다. 이게 마지막인듯 해요
출처는 디씨 힛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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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동에서 지내며 느낀 것 중에 하나다.
어떤 일을 하든지간에 사람이 하는일에는 '휴식'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우리의 체력이나 정신력은 어떤 만화가의 만화처럼 '무한동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험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특히나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큼 휴식 역시 중요한데, 이번 이야기는 이런 휴식에 관한 것들이다.
고시라는 시험을, 백미터 달리기의 스프린터 처럼 전력만을 다해 그 목표에 다다를 수 있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하루, 일주일, 일년의 계획을 짜는데 휴식없이 모든 일정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을 본 적도 들은적도 없다.(아.. 소설 속 인물들은 본적이 자주 있다.해리포터의 헤르미온느라든지 하는)
계획을 수행함에 있어서의 마음가짐은 '하루를 일년처럼, 일년을 하루처럼'.
'슬럼프'라는 말 들어보셨을 것이다. '프로선수도 아닌 니깟게 무슨 슬럼프? 쉬고싶어서 하는 핑계보소ㅋㅋ'라고 한다면 할 말은 딱히 없지만, 이슬을 머금은 새벽 달팽이도 가던 걸음을 멈출때가 있다. 수험생들에게도 이 슬럼프가 찾아온다.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못하면 이 슬럼프는 장기화 되고 심각한 경우에는 당신 마음 속 아궁이에 넣을 '열정'이란 장작마저 사라지게 만든다.
신선들은 휴식에대한 중요성을 어딜가든, 누구에게든 강렬히 주지시킨다. 간혹 이 휴식의 중요성을 설파하다 역풍을 맞는 경우도 가끔 보았는데 이런 것이다.
"휴식은 매우 중요해 니들은 무조건 달리기만 할줄알지?"
"아, 그러셔서 지금 까지 쉬시는지?"
이런 경우엔,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의 생각대로 '사건'이 진행된다.
아무튼, 그럼에도 적당한 휴식은 중요하다. 그래서 난 그 중 몇가지 신선들이 주로하는 휴식의 종류에대해 써보려한다.
가장 흔한 건 역시 술 한잔씩 하는것인데, 물론 '한 잔'이라는 의미는 다들 아실거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있는 곳이 신림동이란 걸 잊고, 자신이 신선인지조차 잊으며, 결국에는 술을 마시는걸 잊을 정도로 마신다. 술잔을 놓고 둥근 달을 보며 시를 읊었다는 이태백이야기처럼, 신선들은 술잔을 놓고 육두문자들을 읊어댄다. 듣다보면 그 대상이 '시험'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삶'인지 모를.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는 말로 시작하여, 지나간 세월에 대한 한스러운 넋두리로 끝난다.
또 다른 신선의 경우엔 주말 아침마다 동호회에서 하는 '조기축구'에 참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선들이라고 무조건 세속을 멀리하는게 아님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들 중에서도 이렇게 사람 만나는 걸 즐기는 분들이 많다. 그런 분들은 저런 운동 동호회에 참석하는데, 이런 신선들은 필시로, 나 같은 수험생에게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곤 한다.
내가 처음 무용담을 들었을 때가 기억이난다.
신선 한 분이 라디오에서 해주는 축구경기처럼 자신의 활약을 리포팅 해주시는데 그 묘사가 마치 '어쩔 수 없이' 고시를 위해 축구를 관둔 메시인 것처럼 들렸다. 메시가 조기축구도 했었나 하는 착각이 들게 만들무렵, 그 분의 말은 이미 '우리나라의 교육'에 대한 문제점을 설파하는 과정까지 다다랐다. 신랄한 비판을 곁들여가면서..
자신은 분명 축구에 재능이 있었는데 운동을 포기한 이유는 역시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의 문제라면서 말이다.
아인슈타인이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으면 동네 보습학원에서 재능교육이나 하고 있었을거라든지, 곤충박사 파브르가 우리나라 사람이었으면 양봉업자나 되서 꿀을 팔았을거라든지, 노벨은 폭약 만들다 빨갱이로 몰려 사형을 당했을거라든지, 헬렌켈러는 지하철 노숙인이 되었을거라든지하는..
그 분의 말 중 재미있었던 건 우리들이 잘 아는 '에디슨'에 대한 이야기였다. 천재는 99프로의 노력과 1프로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을 남긴 장본인. 처음 그 분의 얘길 듣고 실없이 웃었던 기억이 있어 적어본다.
에디슨은 어릴적에 닭의 알이 품어져서 깨어나는 과정을 신기해 했다고 한다. 진짜인지는 모르겠다만 그 분의 말씀에 의하면 그랬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는 닭장에 들어가 새로낳은 알을 그 어린 꼬맹이 에디슨이 닭대신 품었다고 한다. 위인전에는 저렇게해서 부모가 자신의 아들이 호기심이 넘치고 천재성이 엿보여, 소위 말하는 '떡잎부터다른' 사람이라고 묘사해놓았다고 하셨다.
근데 그 신선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 대치동 어머니가 에디슨의 모 였더라면 자기 자식이 저런행동을 한 순간 정신병원에 데려가 지능검사부터 할것이라고 시니컬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내 아들이 어린나이에 미치다니" 라는 상실감에 강남에서 제일잘나가는 과외선생을 붙여뒀을 거라고 말을 이었다. 이 쯤 들었을 때는 나도 실실 웃을 수 밖에 없었는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또 그럴거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신선들의 통찰력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뉴턴의 이야기도 더 해주셨다.
"사과가 떨어지는 걸 보고 중력에 대해 깨우쳤다고?? 아니지 아냐~ 사과는 핑계고 자기이름 위인전에 넣어보고싶어서 한 거짓말이지 안그래? 왜 하필 사과겠어? 자기가 싸는 오줌도 밑으로 떨어지는데? 자기 자서전에 오줌이라고 쓸 수는 없잖아? 그래서 사과라고 한거야~"
이 쯤 듣고는 나도 같이 웃었는데 꽤나 그럴듯하면서도 그 분의 말투가 재밌었기에 더 기억에 남는다. 고시 말고 구연동화 하는 쪽 알아보시라는 말에는 짐짓 근엄하게 "애새끼들은 말을 안들어"
라고 말하시더니 쿨하게 사라지셨다. 그 다음 주에 다리에 깁스를 하고 나타나셔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분이다.
아,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저렇게 운동이나 모임에 주기적으로 참석하여 스트레스와 압박을 이겨내는 분들도 많이 계시다는 말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스트레스해소를 위한 휴식은 대체로 '걷기'였다. 대로변이나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거리를 생각없이 걷다보면 주변의 소리가 들려온다. 바로 세상의 소리들. 그래서 난 귀에 이어폰을 꽂고 걷지 않는다. 이런저런 소리들이 오히려 나를 더 편안케 만들기 때문인데, 우리네가 사는 세상이란게 크게 다를바가 없다는 걸 매번 느끼게 된다. 시장에서 에누리하는 상인과 손님, 사랑하는 연인에게 속삭이는 달콤한 말, 아이들끼리 하는 학교이야기, 오늘이 딸 생일이라며 가던길을 재촉하는 어떤 아저씨 등등..
그런 세상의 소리들은 내가 수험생활에 빠져있는 순간을 '세상속'에 나 역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로 깨우쳐 주곤 했다. 나 홀로 이 길을 걷고 있는게 아니라는 어떤 안도감이 나를 압박 속에서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특이한 취미생활을 가진 신선이 있었는데 그 분은 '빨래하기'가 취미라고 하셨다. 이유가 뭔고 하니, 빨고 빨아서 깨끗해지는 세탁물을 보면 자신의 삶도 시간도 저렇게 처음처럼 변하는 듯한 착각이 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흐를대로 흐른 시간과는 다르게, 자신은 때묻은 세탁물처럼, 인생에 오점을 남긴 것 같아 생긴 취미같다고 말하셨다. 웃을 수 없는 진지한 이야기이기에 내가 할 수있던 말은 별로 와닿지 않을 한 마디의 위로 정도였다. 사실, 어떤 위로도 저 분의 마음을 보듬을 수 있지 못했을 것이다.
아주 드물게는 시간을 잡아 며칠씩 다른곳으로 '휴가'를 다녀오는 신선도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신림동을 벗어나야겠다는 욕망의 발로로, 아주 먼 곳으로 갔다오는 것이다. 목적지는 딱히 중요한게 아니라고 말하며 사람이 많은 관광지는 오히려 피한다고 하셨다. 여기도 사람이 미어터지는데 거기까지가서 사람들한테 치일 일 있냐며..
우리가 휴가를 떠날때 여러가지 짐을 챙기고 사진기도 가져가고 뭐 이런식으로 떠나는 건 아니다. 그냥 그 분들은 '몸'하나만 간다. 그냥 바닷가를 가든 어디를 가든 몸만 다녀온다고 했다. 사진이라도 찍지 않느냐는 내 말에
"눈으로 본거 사진으로 저장해두면 뭐해. 오히려 사진같은게 없어야 나중에 또 가고싶지"
라며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휴식이란 건 우리의 삶 전체로 보았을 때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흐른 시간을 되돌릴 수 없지만, 삶의 고삐를 쥔 건 우리이기에 속도를 늦춰 주변을 바라 볼 수는 있다.
외국의 한 길거리에는 '서행하시오'라는 표지판이 있는곳이 있다. 그 거리의 풍경이 아름다운데, 속도를 내며 달리면 그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없으므로 달아놓은 표지판이라고 한다. 우리네 삶처럼 속도가 능사가 아님을 그들도 알고있는 것이다.
화사하게 쌓인 '첫 눈'위를 지날때 우리는 우리의 발자국이 예쁘게 찍혀 보기가 좋기를 바란다. 우리들 스스로의 삶의 발자취가 예쁘길 바라는 것처럼. 그래서 우린 그 첫 눈위를 걷다가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곤한다. 우리가 지나온 길이 예쁜지 아닌지.
휴식이란 그런 돌아보는 과정이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 돌아보는 시간동안, 다시 눈길을 걸어갈 때 어떻게 걷는게 나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흘러버린 나의 시간이 마음에 들지않는다고해서 그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것 처럼, 그 동안 걸어온 발자국이 다소 마음에 안든다해서 발자국을 옮겨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렇게 눈 위를 걷는 우리가 뒤를 돌아 다시보기하는 시간과도 같이, 휴식 역시도 우리네가 사는 삶의 순간순간을 다시 되돌아보게 만드는 여유로운 발걸음이라 생각한다.
그 시간 동안 지나간 세월의 좋았던 추억도 환기하고, 그렇지 못한 실수같은 것들에 대해선 방향을 바로잡으려는 다짐을 하는것처럼, 나도 여러분도 이따금씩 '서행'하면 된다. 되돌아 보는 방법이나 서행의 방식은 각자가 다를지라도 말이다.
그렇게 앞을보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발자국을 남길 수 있는 여지가 있는것처럼 우리네 삶에도 앞으로의 시간역시 존재한다. 우리는 아직 걸어간 적 없는 눈 위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된다.
프랑스의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평생 결정적인 순간을 찍으려 발버둥 쳤지만,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사진작가로서, 사진으로 평생을 결정적인 모습을 담으려 했는데, 지나보니 자신이 지나온 시간 모든 것들이 결정적인 순간들이었다고 고백한다. 흘러가는 삶이 신을 내며 빨리 달리는 구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삶의 방향을 위한 잠시나마의 '서행'역시 우리의 '결정적인' 한 부분임을 안 것이다.
글이 길어졌다.
나의 시간이 남들보다 늦고, 내가 밟는 삶의 페달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아서, 조바심이 드는 순간. 그래서 주변을 바라보지 못할 때 나 스스로가 기억해두었으면 하는 말로 이 글을 마치겠다.
"주변이 아름다우니, 서행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