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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껌 2
10시 10분. 

예상대로 10시가 넘어서야 도착을 했다. 

눈이 빠져라 나를, 

아니 치킨을 기다리고 있을 딸을 위해서라도 서둘러 집에 가야 할 것 같았다. 



“택시, 택시!”



역 앞에 늘어서 있는 택시 중에 하나를 붙잡는다. 



“문래동이요.”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는다. 

기사는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부쩍 추워졌어요. 그렇죠? 문래동 어디로 모실까요?”



“그러게요. 밤 되니까 더 춥네요. 문래역 1번 출구 쪽으로 가 주세요.”



내 말이 끝나고, 택시가 움직였다. 

서울역 앞이라 비교적 차량이 많은 편이었다.



“저 아저씨, 신촌 로타리 말고, 후암동 쪽으로 가 주세요. 급해서 그런데 조금 빨리 가주시면 감사하겠습
니다.”



“그러죠. 어디 출장이라도 다녀오시나 봐요?”



“예, 당일치기로 강원도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정말 피곤하네요.”



택시가 남대문 경찰서를 끼고, 후암3거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예상대로 차량이 거의 없는 한산한 도로였다.



“그래도 어떻게 저녁은 드셨나 보네요. 껌을 씹고 계신 걸 보니.”



그러고 보니 저녁을 먹지 않았다. 

점심 먹고 씹은 껌을 여태 씹고 있었으니 말이다. 

갑자기 출출함이 느껴진다. 

집에 가면 무슨 요리를 먹을지 생각해봐야겠다.



“무슨 껌 씹으세요? 향이 참 좋네. 방금 씹으신 것 같은데, 저도 하나만 주시죠. 허허.”



기사가 넉살 좋게 웃는다. 

하지만 선뜻 건 낼 수 있는 껌이 아니었다. 



“음... 이 껌은 웬만하면 권해 드리기 힘드네요. 마치 마약과도 같은 껌이라.”



“아, 그런 껌 좋아합니다. 운전장이에게는 껌이 참 중요한데, 그런 껌들이 졸음운전도 방지하고 좋죠.”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계속 씹게 만드는 이 껌의 중독성이 운전수와 잘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까 전에 껌을 뱉었을 때 느꼈던 그 이상 증세, 

그리고 찝찝한 가게 주인의 경고, 등을 생각했을 때 이 껌을 주기는 힘들었다.



“허허허. 드리고 싶어도 제 입에 있는 게 마지막 껌입니다. 강원도에서만 파는 것이니, 어디 구하기도 힘
들 거고요.”



내 말을 들은 기사가 살짝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한다. 

차는 어느새 영등포 로타리를 타기 시작했고 문래역까지는 10분도 채 안 걸릴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끼이익.



차가 급정거를 했다. 

몸이 크게 휘청거린다.



“저 새끼가 신호도 못 보나! 야 이 개새끼야!!”



안전벨트가 아니었으면 다칠 수도 있을 상황이었다. 

목이 약간 뻐근했지만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아, 괜찮으신가요? 요즘 하여튼 자전거 때문에 미치겠다니까요.”



“아, 예 괜찮습니다. 늦은 밤에 자전거는 조금 위험하죠.”



기사가 다시 엑셀을 밟아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말없이 창밖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물론 딸에게 사줄 치킨에 관한 생각이었다. 

역에서 가까운 교촌치킨 쪽으로 많이 기울긴 했지만 말이다.



-아그작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운전석에서 난 소리였다. 

난 기사를 쳐다보았다.



“질겅, 질겅.”



무언가를 씹고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향기가 감돌기 시작한다. 



“아, 아저씨 설마?”



내 시선을 느꼈는지 기사 멋쩍게 웃기 시작한다.



“아아, 밑에 떨어졌던 거예요. 어차피 버릴 거, 제가 그냥 손으로 털고 입에 넣었습니다.”



차가 급정거하면서 주머니에 있던 껌 하나가 밑으로 떨어졌었나 보다. 

용케 그걸 기사가 주운 모양이고. 



“아, 뭐 떨어진 거니까 괜찮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정말 맛있군요, 이 껌.”



“후우... 뭐 어쩔 수 없죠. 단, 뱉을 때 고생 좀 하실 겁니다.”



“....질겅, 질겅, 질겅”



기사는 대답하는 대신 연신 껌만 씹어댔다. 

내가 처음 껌을 씹었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



......



“아, 여기서 세워주세요.”



-끼이익



문래역 1번 출구 앞에서 택시를 멈췄다.



“질겅, 질겅, 예. 7000원 나왔네요. 질겅, 질겅, 와, 이거 단 물이 계속 나오네요?”



지갑에서 만원짜리 하나를 꺼내 기사에게 건 낸다. 

그리고 거스름돈을 받은 후 문을 열었다. 



“아 참, 그 껌 삼키지는 마세요.”



“예? 왜요?”



“처음 껌을 준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삼키면 안 된다고.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허허허. 알겠습니다. 그러죠 뭐. 감사합니다, 손님~.”



반응이 그저 그렇다. 

오주임처럼 씹다가 삼킬 게 눈에 훤했다. 

어쨌든 택시는 제 갈 길로 갔고, 나 또한 몸을 움직였다.



......



......



-딩동, 딩동



“은비야 아빠 왔다~”



10시 30분. 

결국 예상했던 시각에 도착하고 말았다. 

그놈의 치킨이 나오는데 10분이나 걸릴 줄이야.



“자기 왔어?”



현관문이 열리고 아내가 나를 반긴다. 



“아빠~~~ 치킨, 치킨!”



아내 바로 뒤에서 내 딸 은비의 소리가 들린다.



“은비 너~ 맨 발로 현관에 나오지 말랬지! 어서 들어가.”



아내가 딸을 나무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겨운 집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후우. 오늘 정말 피곤했어. 재수 없게 당일치기 출장이라니.”



“그러게 말이야. 피곤할 텐데 어서 씻고 나와.”



“아빠, 치킨, 치킨!! 무슨 치킨 사왔어?”



귀여운 여덟 살 배기, 내 딸 은비가 다리에 매달린다. 

누굴 닮았는지 보면 볼수록 예뻐 죽겠다. 



“짠~ 은비가 좋아하는 교촌치킨~”



은비의 얼굴에서 환한 웃음이 번지기 시작한다.



“와아~ 교촌이다. 아빠 짱!”



“은비야. 손 씻고 먹어야지. 잘 밤이니까 콜라는 조금만 마셔야 해. 알았지?”



“응응, 알았어.”



귀여운 딸의 모습을 보니 쌓였던 피로가 싹 풀리는 것 같았다. 



“자기 밥은 먹었어?”



아내가 내게 물었다. 



“아, 밥 아직 못 먹었어. 집에 뭐 맛있는 거 있어?”



옷을 벗으며 내가 말했다. 

왠지 어제 마트에서 산 ‘3분 정통 스파게티’가 먹고 싶었다.



“그런데, 밥도 안 먹고 웬 껌을 그렇게 씹고 있어?”



“아아, 그냥. 나 어제 산 스파게티 좀 해주라. 물은 조금만 넣는 거 알지?”



껌에 대한 대답을 대충 얼버무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 받아놨어~”



문 밖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빨리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이보다 편할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밥을 먹으려면 껌을 뱉어야 할 텐데, 

아까처럼 몸에 이상이 올까 두려웠다. 

하지만 이대로 밤새 껌을 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물 밖으로 손을 내밀어 아까처럼 퉤 하고 껌을 뱉었다. 



“......”



괜찮았다. 

침이 고이지도, 머리가 아프지도, 오한이 나지도 않았다. 단순히 과민했던 탓이었을까? 

아까와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에 뱉을 때는 단 물이 거의 다 빠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



......



목욕을 마치고 목에 수건을 두른 채 밖으로 나왔다. 

은비가 즐거운 표정으로 신나게 치킨을 먹고 있었고, 아내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그, 은비야, 옷에다가 닦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 하니.”



“으응, 알았어.”



먹는 모습을 보니 배가 몹시 고파온다. 



“자기야, 어서 와. 배고프겠다.”



아내가 자신이 있는 식탁 쪽으로 손짓을 한다. 

식탁에 먹음직스럽게 차려진 스파게티가 눈에 들어온다. 



“와, 마트에서 산 것치곤 엄청 먹음직스럽네. 거 봐 잘 샀지.”



식탁 앞에 의자를 빼 앉았다. 

치킨을 먹느라 정신이 없는 은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그러자 은비가 나를 보며 씨익 웃는다. 

입 주위가 양념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은비의 귀여운 볼을 손으로 살짝 꼬집어 본다.



“세 개에 만원이나 하는데 이정도 때깔은 나와야지. 어서 먹기나 하셔~”



아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포크를 움직여 스파게티를 먹기 시작했다. 

유별나게 맛있지는 않았지만,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나쁘진 않았다. 

허겁지겁 먹는 내 모습을 보며 아내가 살짝 미소 짓는다. 

행복하다. 

이 행복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



......



“은비야 이빨 닦고 자야지.”



“에에? 아까 닦았는데 또?”



“콜라 마셨잖니. 또 치과 가고 싶어서 그래?”



“아앗, 알았어, 닦을게. 이잉.”



......



......



침대에 몸을 뉘이자 마자 잠이 쏟아진다. 

이미 시각은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6시에 일어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짜증이 밀려온다. 



“피곤하지? 자기 밥 먹고 바로 자서 배 나오겠다.”



“으응... 뭐... 배 나오면 나랑 이혼할거야?”



“어휴. 말 하는 것 좀 봐.”



아내가 나의 옆구리를 꼬집는다. 



“나 먼저 잘게. 오늘 있었던 이야기는 내일 해 줄게.”



“알았어요. 낭군님. 어여 주무셔요.”



애교 섞인 아내의 말에 나도 모르게 살짝 입 꼬리가 올라간다. 

그리고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왠지 껌이 꿈에 나올 것 같다.



......



......



-따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릉



......



......



-따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릉



......



......



-따르르르르릉



“......아, 뭐야......”



-따르르르르릉



“자기야, 전화 좀 받... 아 내 핸드폰이구나.”



-따르르르르릉



“오주임이잖아? 이 새끼가 분명히 새벽에 전화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오.”



-따르르르르, 딸칵



“여보세요? 너 미쳤어? 지금 몇 시야!”



- ......



“여보세요? 왜 말이 없어! 졸려 죽겠는데. 빨리 용건 안 말 해?”



- ......껌......좀 주세요.

화가 난다기 보다, 

혹시 이게 꿈인가 싶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다시 말해봐. 뭐라고?”



-......껌......껌이요. 껌 좀 주세요.



매우 가라앉은 진지한 목소리였다. 



“너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내가 어떤 상황인지 알면서 그런 소릴 해?”



나는 그저 황당하고 어이없을 뿐이었다.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생각 없이 행동한 적이 없었건만.



-......제발요. 저 지금 미칠 것 같아요. 제발, 제발요.



나보고 대체 어쩌라는 건가. 

지금 이 시각에 강원도까지 내려오기라도 하라는 건가. 

내려갈 수 있다손 처도 출근시각인 6시까지는 이제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오주임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당부했잖아. 혹시라도 새벽에 전화 할 생각 말라고. 그런데 기껏 전화해서 한다는 말이, 
뭐, 껌 주러 강원도까지 오라고?”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말을 했다. 

그러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화기 너머로 무언가를 긁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봐 오주임. 장난 친 거라고 생각 할 테니. 이만 끊자고. 몹시 불쾌했다는 것만 알아.”



-딸칵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개인적으로 아끼던 오주임이었지만, 

이런 예의 없는 전화 한 통으로 정이 뚝 떨어져 버렸다. 

사람이 미워지는 것은 정말 순식간인 모양이다. 

출장에서 돌아오면 단단히 혼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따르르르르릉



또 다시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자는 오주임. 

나는 한 숨을 깊이 쉬며 전화를 받았다.



“야 이 새끼야. 너 미쳤어?”



다짜고짜 욕을 했다. 

이제 명백히 화가 났다고 선언할 수 있다. 



-......껌, 좀, 제발......



“야 오승원! 이 새끼가 좋게 봤더니, 완전 깨고 있네.”



나는 몹시 흥분했다. 

새벽에 전화를 안 받아 본 것도 아니지만 지금은 너무 경우가 없었다. 

무언가 부탁하는 자세도 전혀 안 돼 있었고, 자세가 되었다고 해도 억지 부탁이었다. 

아니, 

세상에 어떤 마음 좋은 회사원이 후배 직원에게 껌을 주기 위해 새벽에 집을 나선단 말인가. 

그것도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대리님. 제발......



그나저나 정말 절박한 목소리였다. 

언제까지고 이런 대화를 할 수 없어 감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후우. 대체 왜그래. 껌 못 씹으니까 그렇게 미치겠어?”



-......씨발! 껌 갖고 오라고 개새끼야!...



순간 당황했다. 

갑자기 오주임이 욕설을 내뱉는 게 아닌가, 

그것도 매우 심한 욕설이었다. 

나는 심한 충격으로 말없이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핸드폰의 배터리를 빼 버렸다. 

불쾌한 건 둘째 치고,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대체 그 껌이 뭐 길래 이렇게 사람을 미치도록 만들었을까.



“자기야... 무슨 일이야. 이 새벽에 누가 전화 한 거야?”



아내가 잠에서 깨어 눈을 비비며 내게 물었다. 



“어, 아니 뭐. 알잖아. 저번에 집에 한 번 데려왔던, 오주임이라고.” 



아내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오주임? 그 사람이 왜 이 시간에 전화를 해? 술이라도 마셨대?”



그러고 보면 술 취한 상태였을지도 모르겠다. 

오주임의 주사는 사내에서도 유명한 편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 술 취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응, 아마 그런 모양이야. 내일 혼쭐을 내줘야지. 미안해 자기야. 자자.”



......



......



“자기야 일어나. 늦겠어. 6시 10분이야, 10분. 어서 준비해야지!”



6시 10분이라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킨다.



“알람이 왜 안 울렸지? 아... 어제 배터리를 빼 놨지 참.”



침대 옆, 탁상 위에 핸드폰과 배터리가 분리되어 다소곳이 놓여있었다. 

나는 황급히 그것들을 조립하고 핸드폰을 켰다. 

로딩화면이 지나자 은비의 사진으로 꾸민 대기화면이 눈에 들어온다. 



[캐치콜이 38건 있습니다.]



캐치콜. 

통화중이거나, 핸드폰을 꺼놨을 때 걸려왔던 전화를 문자로 보내주는 서비스였다. 

4시에 오주임의 전화를 받고 핸드폰을 껐으니, 

약 2시간 만에 38건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뭐 해 자기야. 아침 차렸으니까 어서 씻고 나와!”



방 밖에서 아내의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나는 잠시 침대 맡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 38건의 부재중 전화가 모두 오주임에게서 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할 뿐이었다.



......



......



“은비야 아빠 나가시는데 인사해야지.”



“하암... 아빠 안녕히 다녀오세요. 아우 졸립다.”



“자기 오늘 나 동창회 있는 거 알지? 저녁 차려놓고 나갈게.”



“엄마, 나는?”



“은비는 엄마랑 같이 가야지. 엄마랑 맛있는 거 먹고 오자.”



“정말! 와 신난다!! 아빠 나 엄마랑 맛있는 거 먹고 올게!”



......



......



“하아암.”



대체 몇 번이나 하품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턱이 안 빠지는 게 용 할 정도로.



“김대리는 하루 종일 하품만 하는구만. 어제 그렇게 피곤했나?”



두툼한 서류뭉치를 책상에 탁탁 두드리던 박과장이 내게 말했다. 

40대 초반으로, 안경을 쓰고 앞머리가 조금 벗겨졌다. 

지극히 셀러리맨답게 생겼다고 해야 할까? 



“아, 예. 조금요. 가뜩이나 힘든데 새벽에 오주임이 술 먹고 전화까지 했거든요.”



내 말을 들은 박과장이 잠시 손을 멈춘다. 



“응? 오주임이? 그래서 오늘 아침에 전화를 안 받은 거구만.”



“아, 예. 뭐... 다른 사람들도 안 받던가요?”



“내가 건 사람들은 다 안 받았어. 이주임이랑, 양주임이랑, 양대리까지.”



단체로 전화를 안 받는다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저, 오부장님은요? 오부장님께는 해 보셨어요?”



박과장이 고개를 젓는다.



“상사한테는 안 했어. 뭐 중요한 전화는 아니었으니까 상관없지만. 기획서 오늘 오후까지 내는 거 알지?”



“예, 지금 쓰고 있어요. 아 그런데 너무 가혹한 거 아닙니까. 당일 출장 바로 다음날에 기획서라니.” 



내가 말하자, 박과장이 눈을 부릅뜬다. 

나는 그 모습에 꼬리를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미리 미리 해 놓으면 좋잖아. 질질 끈 게 누군데 그래. 김상무님 결제니까 깔끔하게 해야 된
다.”



“예, 예.”



골치가 아파온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김상무한테 급조한 기획서가 통할 리가 만무했다. 

갑자기 어제 씹었던 껌 생각이 났다. 

생각만으로도 침이 고이기 시작한다. 

왠지 그 껌을 씹고 있으면 일이 잘 될 것만 같다. 

주머니를 뒤져 껌 하나를 빼 입에 넣었다. 



-아그작



황홀한 단 맛이 마치 전기가 흐르듯 온 몸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왠지 껌의 개수가 줄어든 느낌이었다. 

주머니에서 껌 들을 빼내어 개수를 세어보았다. 



“셋, 넷, 다섯... 여섯.”



여섯 개? 

내가 둘, 오주임이 하나, 그리고 어제 택시기사가 하나. 

그런데 왜 여섯 개가 남은 거지? 

열두 개를 받았으니 여덟 개가 남아야 되는 거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껌 두 개의 행방을 추측할 수가 없었다. 

결국 택시에서 흘릴 때 두 개를 더 흘린 모양이지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 



기획서를 마무리 하고 나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때 쯤 되면 늘 즐거운 기분이 들었는데, 

오늘 져넉은 혼자 먹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인지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정리한 서류들을 파일에 끼워 보기 좋게 꾸며 놓는다. 

기획서와 함께 김상무에게 보여줘야 할 중요한 서류들이었다. 

그런데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들어 보니, 

박과장이 급하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요란스럽게 문을 열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김대리, 김대리. 아직도 전화 안 받는데, 이거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출장 간 사람들 얘기인 것 같았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엔 급한 용무로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아직도 안 받아요? 벌써 저녁 시간이 다 되었는데, 오부장님도 안 받던가요?”



“응, 다 안 받아. 그런데 자네 오늘 시공계획서를 나한테 줬던가?”



“예? 아니요. 그건 강원도에서 팩스로 직접 보내기로 했잖아요.”



박과장이 잠시 숨을 골랐다. 



“김상무님이 지금 확인 좀 하자고 난리신데 큰일이네. 이것들이 뒤통수를 칠 줄이야.”



박과장이 매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회사의 실권을 쥐다 시피 한 김상무에게 밑 보여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오주임한테 또 연락 오면 알려드릴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박과장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리고 기획서 완성 됐으면 상무님께 가보라고. 안 그래도 찾으시던데.”



올 것이 왔다. 

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준비한 파일을 옆구리에 꼈다.



......



......



“......”



“......”



“자네......”



“예, 상무님.”



“이걸 지금 기획서라고 가져 온 건가? 이렇게 급조한 티가 팍팍 나는 종이 쪼가리를?”



“아... 죄송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나름대로? 나는 그 딴말 하는 놈들이 제일 싫어! 나름 대로라니. 그게 대체 무슨 염병할 놈의 기준이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기껏 회사 돈 들여서 강원도 여행도 시켜줬으면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 김대리?”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러니까 기획부가 쓸모없는 부서라는 소리를 듣지. 과장이란 인간은 여태 시공계획서도 안 보여주고 있
고, 부하 직원은 기획서를 이따위로 써 오고. 나 원 참.”



“죄송합니다. 원래는 부장님께 보여드리고 최종적으로 상무님께 보여드려야...”



“그래서 뭐. 부장용으로 썼다 이거야? 말이면 단 줄 아나 이 사람이!”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



“듣기 싫으니까 나가 봐. 박과장이나 들어오라고 해.”



......



......



-아그작



입에 껌이 있는 상태에서 하나를 더 집어넣었다. 

두 개의 껌이 입안에서 합쳐져 덩치 큰 덩어리를 만들어낸다. 

나는 그것을 난폭하게 씹기 시작했다.



“질겅, 질겅, 질겅, 김상무. 개새끼. 질겅, 질겅, 질겅”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퇴근 하고 한참 지났는데도 기분이 풀리질 않는다. 

분을 삭힌답시고 청계천을 거니는 중인데, 꼴불견 연인들의 모습에 오히려 울화통만 더 치미는 것 같다. 

한숨만 푹푹 쉬며 걸음을 옮기다가, 아무도 없는 벤치를 발견하고 그 곳에 앉았다. 

여러 색의 조명을 이용해 알록달록한 물줄기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은비와 함께 왔다면 어지간히 신기해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잠시 그 물줄기를 쳐다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지나간 문자나, 사진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오주임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안 받는다고 했는데 내가 하면 어떨지 궁금한 마음이 든다. 

지체하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우우우우



-뚜우우우우



-뚜우우우우



역시 받지 않는 모양이었다. 



-뚜우우우우



-뚜우우우우



두 번 만 더 기다려보고 끊어야지.



-뚜우우우우



-뚜우우, 딸칵



받았다. 

갑자기 당황스러워져 말문이 막힌다.



-예 대리님.



오주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새벽의 긴박하고, 애절한 목소리가 아닌 평소의 목소리였다.



“어, 어 그래 오주임. 조금 괜찮아?”



-예? 뭐가요?



“어제 술 좀 많이 마신 것 같던데, 괜찮아 진거야?”



-술이라니요. 술 마신 적 없어요.



“뭐? 그런데 너 새벽에 왜... 아니 그보다 과장님 전화를 왜 계속 안 받은거야?”



-아...... 그건, 사정이 조금 있었어요. 단체로 핸드폰을 사무실에 두고 어디를 좀 다녀와서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단체로 핸드폰을 두고 어딘가를 가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말이었다.



“아니, 왜 핸드폰을 두고 어디를 가? 핸드폰 반입이 금지된 곳이라도 있어?”



-음...... 뭐 그런 비슷한 거예요. 이젠 괜찮아요. 안 그래도 시공계획서 지금 팩스로 넣고 있습니다.



이걸로 과장도 다행히 한시름 놓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정상적인 말투와 목소리라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새벽에는 다른 오주임과 통화를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건 그렇고 오주임, 오늘 새벽에 나한테 전화 했던 거 기억나?”



내가 물었다. 

내심 기억나지 않다고 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네, 기억나요. 새벽에는 죄송했어요.



순순한 대답이었지만, 오히려 이 대답이 나에겐 더욱 충격적이었다. 

한마디로 의문만 증폭시킬 뿐이었다. 



“껌 달라고 때 쓰던 게 다 기억난다는 말이지?”



내가 재 차 물었다. 

말 대로라면 나에게 심한 욕설을 했던 것도 기억 날 것이었다.



-네. 하지만 이제 다 해결 됐어요. 대리님의 껌이 없어도 괜찮아요. 



오주임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한다. 

마치 ‘껌을 이제 충분히 구했으니 더 이상 귀찮게 할 일 없을 거다’ 라는 말로 들렸다.



“껌을 구했다는 거야?”



-구했다기 보다는. 깨달았다고 하는 게 맞겠죠. 아 대리님, 끊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 잠깐만,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게 있...”



-딸칵



오주임이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한 동안 멍 한 표정으로 껌만 소리내어 씹었다. 

내 귓가에는 오주임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계속 맴돌고 있다.



-깨달았다고 하는 게 맞겠죠. 



대체 무슨 뜻일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추측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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