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소설] 12vs1 #1
이럴 줄 알았다.
결국은 이런 날이 오게 되는 것이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던 나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엄마가 싫어하는 행동이었지만 이젠 어쩔 수가 없다. 뉴스를 진행하던 아나운서가 목이 메인 듯 말을 하다 말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생방송 중에 저래도 되는 건가? 되든 안 되든 아무튼 곧 화면이 바뀌며 광고 방송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채널을 돌리자 침통한 표정으로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는 대통령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화면 귀퉁이에 KCS독점 생중계라는 광고성 멘트가 바퀴벌레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까지 광고에 집착하는 인간들의 심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이젠 다 끝이다.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억 6천만년이나 지구를 지배했던 최강의 생물 공룡. 그들도 견디지 못하고 멸종해 버렸다.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억 6천만년이나 지구를 지배했던 최강의 생물 공룡. 그들도 견디지 못하고 멸종해 버렸다.
TNT(트리니트로톨루엔)폭탄 1억 메가톤급 규모의 폭발과 섭씨 2만도의 온도를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뜨거운 불길이 지구를 휩쓸고 지나간 뒤, 충돌로 인하여 형성된 먼지구름이 햇빛을 차단시켰다.
그것은 운 좋게 살아남은 소수의 생명체들에게 영하 30도 이하의 혹독한 겨울을 선사해 주었다.
먼지 층이 제거된 후엔 고온에 의해 기화된 바닷물이 다시 온실효과를 일으켜 지구의 온도를 상승시킨다.
다량의 플랑크톤이 폐사하고, 용존산소와 먹이의 부족으로 인해, 마저 살아남은 생물군까지 모두 죽는다.
6천 5백만 년 전에는 공룡이었다. 이젠 아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운석충돌은 사전에 대비할 수 있는 문제였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운석충돌은 사전에 대비할 수 있는 문제였다.
나사에서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 부어 우주를 관측하는 일은 단순히 고용창출의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쏟아 부운만큼의 성과도 있어 운석의 행방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구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상태였다.
그것이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 또한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하지만 과학 기술의 발달은 6천5백만 년 전에 공룡이 하지 못했던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사실 지구와 충돌 확률이 매우 높은 운석의 궤도를 수정하는 일쯤은 현생 인류에겐 문제도 아니었던 것이다.
최첨단 과학기술이란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고작 별 볼일 없는 운석의 궤도 하나 바꾸지 못한다면 애당초 최첨단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 자
체가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다.
제법 열심히 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뉴스에서 운석의 궤도를 바꾸는 작업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름이 4킬로미터에 달하는 화강암 덩어리는 그것으로 영영 지구와 작별했다. 인간들은 환호했다.
물론 챔피언스 리그 따위에도 환호하는 족속들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말이다.
저명인사들이 연일 TV에 나와 현대 과학기술이 이룩한 신기원에 대해 떠들어대었다. 그들은 자연의 섭리마저도 바꿀 수 있는 최첨단 과학
기술을 예찬했다.
혹자는 오직 인간만이 전능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며 '우리는 그 증거를 방금 목격했다.'는 식의 극단적인 논리를 전개하기도 했다.
분명히 그로부터 8개월 후에 2차 운석 군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처음 것은 그저 맛 배기에 불과했다는 듯이 '그것들'은 소리 없이 지구와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귀찮지만 지금이 얼마나 상황적으로 심각한지 알기 위해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조금 귀찮지만 지금이 얼마나 상황적으로 심각한지 알기 위해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이쯤에서 멕시코 유카탄 반도 지하에서 발견된 직경이 각각 180, 100킬로미터에 달하는 크레이터(운석구덩이)에 대해 거론해야 할 필요
성을 느낀다는 말이다.
그건 공룡을 멸종시켰으리라 추정되는 운석충돌의 흔적으로 이정도의 크레이터가 생기려면 적어도 충돌당시 운석의 지름은 10킬로미터 이
상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10킬로미터는 되어 줘야 가속도나 질량 같은걸 따져 보았을 때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군을 멸종시킬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역시 나머지 것들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렇지가 않았다. 이젠 정말이지 큰일 났다.
2차 운석군의 정확한 개수는 49개였다. 가장 작은 운석의 지름이 2킬로미터였고, 큰 것은 50킬로미터에 육박하기도 했다.
2차 운석군의 정확한 개수는 49개였다. 가장 작은 운석의 지름이 2킬로미터였고, 큰 것은 50킬로미터에 육박하기도 했다.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현대의 최첨단 과학기술로도 이것만은 감당할 수 없었다.
먼저 번 보다 더 열심히 한다고 해도 막아낼 수 있는 것은 고작 5개 뿐이었다.
각도가 달라 지구를 비켜가는 것들이 7개였고, 그 외에 나머지는 모조리 지구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아나운서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것은 여기까지 말한 후였다. 결론을 말하자면 적어도 30개 이상의 운석이 지구와 충돌한다는 뜻이었다.
지구는 입안에 들어간 비스킷처럼 산산조각이 나버릴 것이다.
운석충돌 8시간 전에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와 그 이야기를 했다. '죄송합니다. 이제 지구는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도대체 지구가 멸망
하는데 대통령이 왜 죄송한지 그 이유를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예전에 어떤 개그맨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진즉에 출근하셨고(새벽에 집에 들어오다가 경찰서에 비상이 걸려 출근하는 아버지와 마주쳤다), 보험설계사인 어머니도 아침
아버지는 진즉에 출근하셨고(새벽에 집에 들어오다가 경찰서에 비상이 걸려 출근하는 아버지와 마주쳤다), 보험설계사인 어머니도 아침
부터 출타중이셨다.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는 동생은 2주에 한 번씩 집에 내려오곤 했는데 여자 친구가 생긴 후론 그마저도 뜸해졌다.
집에 남은 사람이라곤 군대를 갓 제대하고 복학할 준비를 하고 있던 나뿐이었다.
전날 친구들과 늦게까지 과음을 하고 새벽에 집으로 기어들어와 11시간을 잔 뒤, 일어나 오줌을 누고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마신
다음 텔레비전을 켰을 때 대통령이 나와 지구가 멸망할 거라고 했다. 나는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지구가 멸망한단다. 이건 정말이지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답이 안 나오는 문제다
원래는 인터넷으로 영화를 다운받아 볼 생각이었지만 덕분에 이젠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원래는 인터넷으로 영화를 다운받아 볼 생각이었지만 덕분에 이젠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가 멸망한다고 했을 때, 이런 걸 해야겠다고 미리부터 생각해 두는 녀석은 아마 없을 테니까 말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아까부터 발가락이 간지러웠지만 별로 긁고 싶지도 않았다.
지구가 멸망하는 시점에서 발가락은 긁어 뭐하겠느냔 말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어느새 발가락을 긁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린 것은 그 다음이다. 발신번호를 보니 동생이었다. 아마 녀석도 뉴스를 봤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나는 머리를 탁 치며, 좀 더 빨리 깨닫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가 멸망한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행동이란 가족에게 전화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동생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얼이 빠져서 발가락이나 긁고 있는데 그새 정신을 차리고 전화해 준 한 동생에게 고맙고 미
안했다.
"기철이냐?"
"기철이냐?"
"어, 형. 나야. 뉴스 봤어?"
"봤지 그럼. 시발 좆됐다. 인제 어떡하냐?"
"형...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난 그냥 여기 남아 있을게. 여자 친구랑 지구가 멸망할 때 까지 함께 있기로 했어. 내가 지켜주고 싶어. 부모님
한테 대신 안부 좀 전해줘. 방금 엄마한테 전화 왔는데 당장 오라고 난리도 아니야. 이런 날 일수록 가족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데 그놈의 극
성 알잖아. 어차피 차편도 다 끊겨서 못 갈 거야. 지구가 멸망한다는데 버스 운행이 가당키나 하냐고. 아무튼 그동안 수고 했어 형. 앗... 미
진아, 거긴 깨물지 마. 형, 잘 지내고. 참, 내 책상서랍 3번째 칸에 15만원 넣어놨거든. 그거 쓰려면 써."
전화를 끊은 후 나는 다시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발가락을 긁던 손톱이었다. 어쩐지 짭짤하더라. 나는 시부렁거
리며 입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그러다 또 발가락이 간지러워져서 마저 긁었다. 시계를 보니 11시 45분이었다. 지구멸망까지는 7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아까 하던 생각을 마저 할까 하다가 이내 관두기로 했다. 뭘 해야 할지 생각하는 건 그냥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결론을 내
렸다. 나는 일단 밖으로 나가서 뭐든 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세상의 마지막 날이므로 뭘 하든 상관없지 않겠냐는 식이었다. 어제 술에 취해
아무렇게나 벗어두었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전날 술자리에서 바지에 안주를 흘리긴 했지만 이젠 별로 갈아입고 싶지도 않았다. 물
론 평소 같았음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오늘은 날이 날이니 만큼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사람이란 세상의 마지막 날엔 좀 더 자신에게 관대
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문밖을 나섰다.
그리고 역시 세상의 마지막 날엔 뭐가 달라도 달랐다.
아파트 복도에서 내려다보이는 광경은 한마디로 요약해 아수라장이었다. 마치 B급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규칙과 질서가 사라진 곳에서 유일한 진리는 역시 폭력이었다. 옆집 아저씨가 아파트 복도
에 우두커니 서서 그 아수라장에 시선을 던지고 있다가 내가 급작스럽게 문을 열고 나오자 필요 이상으로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
저씨는 곧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민망했던지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우리는 어정쩡하게 눈을 마주친 뒤 계면쩍게 눈인사를 나누었다. '왜
저래?'라고 생각하며 복도 아래를 내려다 본 후에야 나는 아저씨가 왜 그렇게 놀랐는지 알 수 있었다.
내 시선은 한 무리의 집단적 광기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제각각 쇠파이프로 무장했으며, 피를 잔뜩 머금은 쇠파이프를 어깨에 둘러매고 어
슬렁거리며 아파트 주차장을 배회하고 있었다. 이미 대부분의 차가 박살이 난 상태였다. 필시 녀석들의 소행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
다는 듯 놈들은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방황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주변엔 십 수 명의 사람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널브러
져 있기까지 했다. 남자, 여자, 노인,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쇠파이프에 얻어맞아 머리통이 박살난 상태였다. 역시 세상의 마지막 날이
니까 저런 놈들도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경찰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말 그대로 무법지대였다.
놈들은 모두 12명이었는데 하나같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나이는 많아 봐야 나와 비슷한 또래 거나 혹은 그보다 어려 보였다. 개
중엔 아직 젖살조차 빠지지 않아 영락없이 어린애처럼 보이는 녀석도 있었는데, 그런 놈들이 건들건들 거리며 무시무시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흉포한 놈은 파란 모자를 쓴 녀석이었다. 내가 녀석을 관찰한 것은 불과 몇 분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놈이
가장 잔인했다. 한 대 쳐 맞으면 바로 울어버릴 것 같은 샌님 같은 얼굴로 벌써 다섯 명 째다.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순식간에 다섯 명이나
해치워 버렸다. 내가 보기 전부터 그랬을 테니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다. 마치 두더지 게임이라도 하듯 눈에 보이는 족족 쇠파이프로 머리
를 찍어대는 모습이 구역질 날 정도였다. 한방에 죽지 않는 사람들은 죽을 때 까지 몇 번이고 머리통을 얻어맞아야 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한 사람씩 죽을 때마다 그 미친놈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친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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