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threadic] 푸른수염
"보수는 넉넉해요. 아니, 여기보다 더 잘 쳐주는 곳은 없을걸요."
선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괜찮은 급여였다.
"할 일도 별로 없을 거예요. 사실 이 집 애가 굉장히 영리하거든요. 그래서 사실 선생들 말을 귀담아 듣지도 않지만, 뭐 어쩌겠어요.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니."
자신을 이 집의 상주 가정부라고 소개한 민씨는 선영이 가르치게 될 아이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품고 있는 듯 했다.
"그럼 언제부터 아일 가르치면 되는거죠?"
"내일부터 매일 3시부터 5시까지 두 시간 동안, 아니 시간 된다면 오늘부터래두 괜찮아요."
선영은 이 집에 사는 소년의 가정교사로 고용되었다.
그러나 말이 가정교사지 사실상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매일 두 시간, 그러나 그것은 아이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아이 아버지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데 쓰일 것이다. 홀아비로 아들 하나를 키우고 있다는 이 집의 주인은, 아들이 무식한 가정부와 하루종일 붙어있는 것을 못 견뎌했다.
아마도 아이에게 무식함이 옮을까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굉장한 기우로, 민씨의 말에 의하면 이 집의 소년은 몹시 영악하고 똑똑한 아이였다.
아이의 방으로 안내받으며 선영은 집 내부를 훑어보았다.
집은 보통 가정집 치고는 꽤나 큰 편이었고 가구는 모두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급스러웠다.
선영은 대번에 이 집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집의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안녕하세요."
마치 사탕같은 눈동자를 굴리며 아이가 인사를 건넸다.
"네 이름이 뭐니?"
"현진이에요."
"그래, 현진아.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난 이선영이야."
아이는 별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 앞에 앉았다.
수업은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딴 짓을 하지도 질문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예의상이 분명해 보이는 미약한 호응만 해주었을 뿐이었다.
선영은 깨달았다. 이 아이는 지금 그녀의 설명을 조금도 듣고있지 않았다.
선영은 한 숨을 내쉬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공부하기 싫어하는 말썽쟁이가 훨씬 속 편할 것 같았다.
선영이 아이의 아버지, 그러니까 집 주인과 대면한 것은 가정교사 일을 시작한지 일주일 째 되던 날이었다. 선영이 막 퇴근하기 위해 짐을 챙기고 있을 때 집으로 전화가 왔다.
한참 전화 너머의 인물과 두런두런 얘기를 하던 민씨가 전화를 가지고 2층 아이방으로 올라왔다.
"주인 어른께서 선생님 좀 바꿔달래요."
선영은 의문을 느끼며 전화를 받아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현진이 아비되는 사람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은 제가 새벽 늦게 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현진이가 잠들 때까지만 선생님이 같이 있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물론 그만큼 시간을 계산해서 이번 달 말 급여로 같이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아주머니도 집에서 자고 오는 날이라 현진이를 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비록 전화기를 한 번 거친 전자음일 뿐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매력적이었다. 말하자면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중저음인데, 그러나 그 이상으로 사람을 긴장시키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선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아뇨, 어차피 집에 가면 할 일도 없는데 그냥 하룻밤 묵고 갈게요. 아무리 잠들었다고 해도 애 혼자 두기도 그렇구요. 급여는 따로 쳐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자는 정중하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서 선영은 싱긋 웃었다.
현진은 얌전한 아이였다.
저녁 열시가 되자 잠옷으로 갈아입고 선영에게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먼저 잘게요. 선생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너도."
거실에 앉아 책을 읽던 선영이 대꾸했다.
동그란 눈으로 잠깐 선영을 눈여겨본 현진은 금방 2층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새벽, 비어있는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선영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집 주인인가?'
잠이 덜 깬 얼굴로 아래층에 내려가보니 우산을 털고 있는 장신의 남자가 보였다.
회색 정장 위에 검은색의 긴 코트를 입은 사내였다.
고개를 돌리다 선영을 발견한 그는 잠깐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시원스럽게 웃으며 다가와 성큼 악수를 했다.
"반갑습니다, 선생님. 제가 현진이 아빕니다."
그는 보기좋게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 날카로운 눈매와 콧날, 그리고 육감적인 입술이 인상적인 미남이었다. 남자에게 붙이기는 무엇하지만 섹시하다는 표현을 가져다 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의 모습을 훑어본 선영은 그와 맞잡은 손을 흔들며 미소지었다.
'생각보다 잘생겼네…….'
사내는 아침을 먹고 가라며 선영을 붙잡았고, 그녀는 못 이긴 척 식탁 앞에 앉았다.
그는 아주 매력적이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대화의 맥을 짚어 상대가 불쾌하지 않을 선에서 이야기를 끌어나갈 줄을 알았다. 간혹 의표를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들도 종종 있었지만 그것은 당혹감 보다는 대화에 대한 짙은 흥미를 안겨다 주었다.
그와의 대화는 몇 시간을 내리 해도 즐거울 것이 분명했다.
"오셨어요."
잠에서 깬 현진이 2층에서 내려왔다.
어린아이에겐 다소 이른 시간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머리는 단정했고 옷차림은 지적할 데 없이 단정했다.
조금의 졸음도 묻어있지 않은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래, 이것저것 일이 좀 생겨서 방금 전에야 도착했단다. 간밤에 별 일은 없었지?"
사내가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건넸다.
"네."
선영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상하고 다정한 아버지와 공손한 아들의 조합이었는데, 어쩐지 그들 사이에는 조금의 온기도 흐르지 않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현진은 어쩐지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소년의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지만 자세히 바라보면 핏기를 잃은 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사내가 떠나기 위해 겉옷을 껴입는 선영에게 말했다.
"지금 밖에 비같이 질척거리는 눈이 옵니다. 땅은 얼어서 미끌거리고요. 제가 댁까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어제 수고해주셨는데 혼자 보내드리기 미안해서 그렇습니다."
"어머, 간밤에 눈이 왔나요? 지금도 내리네! 세상에, 정말 겨울이군요."
선영은 호들갑스럽게 말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힘없이 너풀거리는 눈송이가 천천히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차를 세우며 사내가 말했다.
"바래다주셔서 감사해요. 아, 그러고보니 오늘 오후엔 집에 계시나요? 그럼 몇 시간 후에 다시 뵙겠네요."
선영의 말에 사내가 잠깐 눈을 깜빡거렸다.
"제가 이 말을 깜빡했군요. 선생님, 오늘은 나오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오늘까지 나오라고 한다면 전 정말 악덕 고용주가 되는게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오늘은 별 다른 스케쥴이 없어 하루종일 집에 있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현진이랑 얘기도 하고 놀아줄 생각입니다. 바깥 일이 바빠 신경을 통 못 써줬더니 녀석이 자기 아빨 너무 어려워해요."
다음날, 선영이 현진의 집에 갔을 때 아이는 계단참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평소의 영민하고 재빠른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고, 다만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가라앉은 얼굴 뿐이었다. 선영은 아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현진아, 선생님 왔어."
아이답지 않은 시원스런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 잠깐 놀란듯한 아이는 황급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저 좀 봐요. 잠깐이면 돼요."
현진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몹시도 초조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니?"
현진은 아래층을 힐끗 살펴보았다.
곧이어 아이는 선영의 팔을 끌고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선생님, 제 말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저희 아버지랑 가까이 지내시면 안돼요."
비장감마저 감도는 소년의 얼굴을 보며 선영이 얼빠진 듯 되물었다.
"왜 그래야 하는데? 가까이 지내지 않을 수가 없잖아. 네 아버진데."
"아무것도 묻지 말아주세요. 제발요. 어제처럼 아버지가 호의를 보여도 관심갖지 마세요."
선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현진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럴 순 없어, 현진아. 내가 현진이 선생님인데 어떻게 아버님에게 관심을 안 가질 수 있니. 선생님은 네가 왜 그러는지 알아요. 아빠를 빼앗기기 싫은거지? 선생님도 어렸을 땐 그랬단다. 하지만 그러면 못써요. 응?"
현진은 눈을 내리깐 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이가 어느정도 말을 알아 들었다고 생각한 선영은 아이를 지나쳐 책상 앞에 앉았다.
"자, 수업하자."
그때 현진이 고개를 휙 치켜들었다.
놀랍게도 소년의 얄쌍한 눈꼬리에는 눈물이 한 가득 맺혀 있었다.
"왜 다들 내 말은 듣지도 않는거야! 다들 바보야, 바보라구!"
울먹임 섞인 외침을 끝으로, 현진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선영은 아이가 뛰어나간 문을 망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현진이 집으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난 후, 즉 선영의 퇴근시간이었다.
아이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막 집을 나서던 선영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조금 전의 일에 대해 물어보려던 선영은 아무것도 내비치지 않는 현진의 얼굴에 달싹이던 입을 다물었다.
선영이 사내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부터 전화가 왔다.
막 잘 준비를 하던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액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통화 버튼을 눌러버렸다.
―오랜만, 아니 하루만이군요. 저 현진이 아빱니다. 괜찮으시다면 술이나 한 잔 같이하지 않겠습니까?
식사를 대접해드리고 싶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선생님이 현진이를 가르치시게 된 이후로 밥 한 끼도 못 사드린게 마음에 걸리더군요.
그래서 늦은 시간에 실례가 되는줄 알면서도 전화드렸습니다.
호텔 최고층의 스카이 라운지에 들어서자 저 구석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는 사내가 바로 눈에 띄었다.
그는 선영 뿐만이 아니라 라운지 내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단지 외모 때문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준수한 외모를 능가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가령 육식동물을 연상케하는 느른함이라던가, 수면 아래에 잠들어 있는 흉포함 같은.
그것은 표출되어지지 않았을 뿐, 언제고 오발탄처럼 제멋대로 타인의 살갗을 찢어놓을 수 있었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 아래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서늘함은 괴리감을 부추긴다.
그 누구보다도 신사적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 야수같이 돌변할 수 있는 남자.
그러한 결핍과 위태함이 여인들로 하여금 그를 매력있는 사내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여자들은, 알면서도 빠져든단 말이지…… 알면서도 당하고 말이야.'
그녀를 발견하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내를 보며 선영은 미소지었다.
길쭉한 손의 움직임에 따라 잔에 든 붉은 액체가 찰랑찰랑 움직인다.
잠깐 뜸을 들이던 사내가 한 모금 입을 축인 후 묘한 어조로 말했다.
"역사가 이어오는 동안 가장 오래된 술이 뭔지 아십니까?"
"음…… 잘 모르겠는데요."
선영이 대꾸했다.
빙긋 웃은 사내가 자신의 잔을 선영의 잔에 건배하듯 부딪쳤다.
"바로 이 포도주죠. 어머니 세멜레의 죽음 이후 요정들에게 키워진 디오니소스는 숲을 돌아다니다 짓물린 포도가 발효되어 포도주가 되는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인류 최초의 술이었던 셈이죠."
하지만…… 사내가 덧붙였다.
"난 이 포도주보다 훨씬 맛있는 음료를 알고 있습니다. 달콤함과 향긋함에 있어서는 비교조차 안 되죠."
"그게 뭔데요? "
"그건 비밀입니다."
약간은 교양 없게 잔에 남은 와인을 훌쩍 들이마신 사내가 씩 웃었다.
"참 이상하죠.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어디서 본 것같단 느낌을 지울 수가 없으니."
선영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 너무 진부한거 알아요? 지금 작업거는 거예요?"
사내는 테이블 가까이 상체를 당겨 앉았다.
"그럼 그렇다고 해둘까요?"
"뭐예요. 그게 고래로 얼마나 많이 써먹힌 멘트인데. 그래서야 오던 여자도 도망간다구요."
그러나 말과 다르게 선영은 싫지 않은 얼굴이었다.
사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가 지금껏 한 말은 모두 하늘에 맹세코 진실입니다. 선영 씨, 만난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난 당신에게 굉장한 끌림을 느꼈어요. 당신을 더 알아가고 싶습니다."
"음…… 현진이 아버님? 아, 뭐라고 부르면 되죠?"
"이런, 이름도 말씀드리지 않고 다짜고짜 고백부터 했군요. 당신이 너무 맘에 들어서 급한 마음에 실수했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제 이름은 하재열입니다."
"그래요 재열씨. 나도 당신에게 호감이 있어요. 하지만 난 당신에 대해 아는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일거구요. 더군다나 나는 현진이의 선생이에요. 지금 당장 어떻게 해보자는거면 사양하겠어요."
사내는 선영 쪽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의자에 깊숙이 파묻었다.
"난 그 정도로 무례하고 성급한 사람은 아닙니다. 말했다시피, 당신을 더 알아가고 싶은 것 뿐이니까요."
선영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마지막으로 말하는 거예요. 앞으론 나도 상관 안 할 거예요. 아버지 곁에 가지 마요."
애써 침착하려하고 있었지만 둥근 눈동자는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다.
선영은 무릎을 굽혀 현진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현진아, 언제까지 이렇게 고집을 피울거니. 아버지가 요 몇 일간 선생님이랑 만난다고 네게 소홀한걸 알고 있어. 선생님도 미안하게 생각하구.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아버지와 선생님의 일에 끼어들 수 있냐 하면 그건 아니잖니."
이내 선영의 시선은 현진의 입술에서 멎었다.
분홍빛의 통통했던 그것은 이에 짓눌려져 조금씩 붉은 선혈을 내보이고 있었다.
현진이 악에 받친 듯 외쳤다.
"그런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고요! 아버지는……."
"현진아, 버릇없이 선생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당장 사과하거라."
현진은 마치 질소에 노출된 사람처럼 한 순간 얼어버렸다.
선영은 고개를 들어 소년의 뒤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누가 어른에게 그렇게 소리지르고 화내도 좋다고 했니. 혼나야겠구나."
사내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는 현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의 손가락이 마치 옥죄듯 소년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선영은 약간 놀란 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미안합니다, 선영 씨. 자식교육을 잘못시켜 이런 꼴을 보여드렸군요."
사내가 현진에게 말했다.
"이 아빠는 네게 실망이 크다. 따라와."
현진의 눈이 선영을 향했다.
맵시좋은 눈은 마치 도움을 갈구하듯 절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선영이 뭐라 입을 떼기도 전, 사내는 현진을 끌고 가버렸다.
―지금 집 앞에 있어요. 잠깐만 나와주시겠습니까?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선영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정말 그녀의 집 앞에는 멀리서도 한 눈에 띄는 고급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사내는 핸드폰을 귓가에 댄 채 그녀가 있는 곳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사내가 인사하듯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선영도, 사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 낮의 일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먼 곳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사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도 보셨겠죠. 그렇습니다, 현진이는 절 무서워합니다."
선영은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수려한 선을 그리고 있는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아이 엄마가 죽은 후 현진이에게 많은 신경을 써줬어야 했는데, 일이 바빠 그러질 못했습니다. 당시의 전 애 엄마를 잃은 슬픔을 추스리기도 버거웠습니다. 그렇게 방치되어 자란 현진이는 사람을 무서워 합니다."
"사람을 무서워 한다뇨? 그런건 못 느꼈는데요."
선영의 말에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내색을 하지 않을 뿐 현진이는 온통 겁에 질려 있어요. 아비인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자길 해칠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젠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자기 자식에게조차 미움받는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말을 마친 사내는 성마른 손짓으로 비통함에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당신이 있어 다행입니다. 이렇게 슬픈 날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당신 외엔 생각나지 않았어요. 선영 씨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홀로 술병으로 나발을 불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답지않은 모습은 여자들의 모성애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 어떤 여자라도 그를 껴안고 등을 쓸어내려주지 않고선 못배길 것이다.
'강한 사내의 빈틈은 여자를 파고드는 최고의 무기지…….'
사내를 껴안으며 선영은 생각했다.
코와 코가 부딪힐 듯 아슬하게 스쳤다.
사내의 뜨겁고 메마른 입술이 선영의 것을 금방이라도 삼켜버릴것처럼 빨아들였다.
여유 따윈 요만큼도 없는 초조하고 성급한 키스였다.
그녀의 가지런한 치열을 훑어내린 혀가 구내를 탐험하듯 움직였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의 호흡을 따라가기 힘들어 선영은 숨을 헐떡였다.
사내가 입술을 떼자 선영은 오랫동안 물 속에서 숨을 참았던 사람처럼 황급히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의 손이 선영의 셔츠로 향했다. 긴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첫번째 단추를 풀어낸다.
그때 선영의 손이 그를 저지했다.
잠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 사이 숨을 고른 선영이 사내의 눈을 직시하며 결심한 듯 말했다.
"지금 현진이에겐 엄마가 필요해요. 난 현진이를 품어줄 수 있어요.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난 당신에게 사랑을 느껴요. 당신은 내가 필요할 거예요. 아니, 필요해요. 나와 결혼해줘요, 재열 씨."
사내는 잠깐 멈칫하며 선영을 바라보았다. 선영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청혼을 거절한다면…… 나는 당신을 영영 놓치게 되는건가요?"
"그리고 이 단추도 더 이상 못 풀게되죠."
선영이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을 들어올렸다.
"이런."
애매모한 미소를 짓던 그는 선영에게로 기울였던 상체를 바로했다.
"좋습니다. 이상하게도 당신은 처음부터 너무 날 끌어당겼어요.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가 먼저 선영 씨에게 청혼했을 겁니다. 우리 결혼해요."
그제서야 선영은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앞으로 선생님이 현진이의 엄마가 될 거란다."
선영과 사내, 현진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선언하듯 말했다.
오랜만에 본 현진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이, 사내의 말에 더욱 핏기없이 변했다.
"그래, 현진아. 힘들겠지만 이 선생님을 엄마로 받아들여주렴. 지금 당장 엄마라고 부르지 않아도 괜찮아. 선생님은 기다릴 수 있어."
"선생님……."
어쩐지 아득한 목소리였다. 현진은 보기 싫은듯 눈을 질끈 감았다.
선영이 난처한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자 그는 한숨을 쉬었다.
결혼식을 이틀 남겨둔 어느날이었다.
선영은 이미 사내의 집 빈 방에서 머무르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현진이 그녀를 찾아왔다.
"선생님."
"응? 현진아? 무슨 일이야. 안 자고 뭐하니."
현진은 울것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소년은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억눌렸던 무언가가 뺨으로 턱으로 떨어졌다.
"선생님, 나는 아버지가 무서워요. 아버지는 날 죽일 거예요. 난 알아요, 내가 선생님께 아버지에 대해 말해버리려고 한 걸 봤잖아요. 날 가만히 둘 리가 없어요. 이제 난 살려둘 가치가 떨어졌단 말이에요.
아버진 쓸모없이 떠들어대는 후계자따윈 필요하지 않으세요."
선영은 현진의 등을 쓰다듬으며 사내의 말을 떠올렸다.
―내색을 하지 않을 뿐 현진이는 온통 겁에 질려 있어요. 아비인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자길 해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속으로 쓰게 웃으며 현진을 안아주었다.
"그래, 괜찮아. 다 괜찮아. 선생님이 현진이 지켜줄게."
그 말에 안심이 되었는지 아니면 진이 다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는 곧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현진이 실종되었다. 아이는 뒷산에서 발견되었다. 토막나서 트렁크 안에 들어있는 채였다.
민씨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선영은 멍하니 아이의 영정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내를 흘끗 보았다. 속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발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생님, 나는 아버지가 무서워요. 아버지는 날 죽일 거예요.
마지막으로 들었던 아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선영은 가슴을 툭툭 쳤다. 답답했다. 더 강하게 쳤다. 그래도 가슴을 꽉 틀어막은 것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제서야 선영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죄책감이었다.
가슴이 미어질 듯 밀려오는 죄책감에 선영은 숨을 몰아쉬었다. 결혼 후 단 몇 일 뿐이었지만 그녀는 현진의 엄마였다. 눈물이 바닥에 방울방울 떨어졌다.
'미안해…… 미안해…… 다 내 탓이야…….'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눈물 한 방울 안 보일 수가 있죠?"
민씨가 북받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아이의 작은 관이 땅에 파묻힐 때까지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를 본 모든 사람들은 진정으로 비정한 사내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현진의 출생부터 함께였다는 민씨는, 영악한 아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을지언정 깊은 정이 있었다.
그녀는 마치 자기 자식을 잃은 양 슬퍼했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영정사진 봤어요? 애가 아홉살이 될 때까지 제대로 된 사진 한 장이 없었어요. 한 장도. 오죽하면 학교 단체사진을 확대시켜서 썼겠냐구요. 짐승도 제 새끼는 소중한 법인데……."
민씨의 눈빛이 희번득해졌다.
"그러고보니 수상한 게 많아요. 사모님도 한 순간에 돌아가셨어요. 급체해서요. 그땐 그런가보다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이상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에요.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양반이, 게다가 살찐다고 여섯시 이후론 뭘 입에도 대지 않았던 양반이 급체라뇨? 그래, 처음부터 뭔가 있었어요. 사모님이 그 제비같은 자식을 데려왔을 때부터 난 그놈이 수상했어!"
"제비같은 자식이요?"
선영이 물었다.
"그래요, 제비같은 자식요. 그 자식이 타는 차, 사는 집, 가구 하나까지 모두 그 자식 게 아니었다구요. 뭐가 그놈 거냐구요? 숟가락 젓가락은 제놈 거겠죠. 맞아요. 숟가락 젓가락만 들고 이 집에 들어왔어요. 그런 주제에……."
민씨는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선영은 마른 침을 삼켰다.
"더 말해보세요, 아주머니. 더요."
"번지르르한 얼굴 말곤 볼 것 하나 없는 놈이었는데,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재산을 꿰차고 제가 주인인 양 행세하기 시작했어요. 그러고보니…… 세상에."
민씨의 낯빛이 거무튀튀해졌다.
"그러고보니 여태껏 현진이 선생님으로 온 여자들은 전부 말도 없이 일을 그만뒀어요. 사라져버렸다고요. 그리고 다들 그 자식이 좋다고 매달렸고……."
토막살인, 그것도 아이를 상대로 한 그것은 쉴 새 없이 언론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들은 바로는 현진은 둔기로 머리를 강하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성인 남자의 힘으로, 사내의 재산을 노린 자들이 납치가 여의치 않자 아이를 살해해 유기한 쪽으로 결론이 나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 집엔 열리지 않는 문이 있어요."
민씨가 말했다.
"사모님이 계셨을 땐 없었던 거예요. 어느 순간부터 그 방문은 열리지 않았어요."
"방문이라구요……."
선영은 표정을 굳혔다.
"그놈은 모를거예요. 사모님은 마스터키를 가지고 계셨어요. 그건 지금도 사모님의 화장대 서랍에 있어요."
현진의 죽음에 의문을 느낀 그녀는 자신이 아는 모든것을 선영에게 말해주었다.
언제나 스스로의 무지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던 그녀는 복잡하기만 한 이번 일은 스스로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전 부인이 썼던 방은 침실에 딸린 방이었다.
그리고 그 침실은 사내가 그 외에는 아무도 허락하지 않았던 공간으로, 민씨는 물론 현진까지도 들어가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선영이 머무르는 곳이기도 했다.
선영은 심호흡을 하고 전 부인의 방을 열었다.
방은 먼지가 엉망으로 앉아있는 것만 뺀다면 생전에 썼던 그대로인 것 같았다.
흰색의 화장대는 입구 맞은편 벽에 있었다. 선영은 천천히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서랍을 당기자 이리저리 엉켜있는 여러 잡동사니들이 보였다.
그 중에는 마스터 키로 추정되는 열쇠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선영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즉석사진 한 장을 집어들었다.
지금보다 훨씬 앳된 모습의 사내와 전 부인이 다정히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선영은 이내 한숨같은 실소를 터뜨렸다.
"지금 여기서 뭘 하는겁니까?"
등 뒤에서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선영은 황급히 열쇠를 등 뒤로 숨겼다.
사내가 문 앞에 서서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양 뺨이 약간 수척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냥, 이곳은 어떤 방인가 해서 들어와봤어요."
잠시 의심스런 눈초리로 선영을 바라보던 사내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방 밖으로 이끌었다.
"선영 씨가 찾아볼 것이 못 됩니다. 창고나 다름없으니까요."
어깨를 감싸여진 채 밖으로 나가던 선영은 고개를 돌려 주인을 잃은 방을 힐끔 바라보았다.
몇 년 전 갈아입었을 옷가지가 여기저기 널려있고 빼놓았던 책이 정돈되지 않은 채 무질서하게 놓여있는 모습은 어쩐지 애잔함을 불러일으켰다. 생동감이 있었으나 회색으로 죽어있었다.
주인만 덧그려진다면 완벽했을 방은, 그렇게 덩그러니 남겨졌다.
선영은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민씨가 말했던 바로 그 문이었다.
그녀는 잠깐 맞은편 모퉁이를 바라보았다. 안심이 되었다.
구멍에 열쇠를 밀어넣자 문이 스르륵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잠깐 등골이 서늘해졌다.
방은 황량했다. 있는 것이라고는 어두운 방 안을 유일하게 밝히고 있는 냉장고와 테이블, 의자밖에 없었다.
그것 마저도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만큼 어두워서 확실치 않았다.
어둠 속에서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다보니 냉장고의 불빛 앞까지 가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선영은 약간 주저하며 냉장고의 손잡이를 당겼다.
"아……."
그녀는 탄식을 터뜨렸다.
마치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이 뇌를 엄습했다.
꽤 커다란 냉장고 속에는, 잘 포장된 피임이 분명한 액체와 종류가 불분명한 랩에 싸인 고기가 있었다. 선영은 눈물처럼 눈가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냉장고 문을 닫으려던 선영은 순간 멈칫 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언뜻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냉장고 문이 열리며 밝게 비춰진 벽에는 선반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선반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병들…….
포르말린에 담가져 있는 여자들의 머리였다.
방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리던 선영은 그녀의 몸을 껴안듯 옥죄는 서늘한 체온에 굳어버렸다.
"이미 다 봐버렸네……."
귓가에 음산한 목소리가 틀어박혔다.
"그럼 앞으로 일어날 일들도 알겠네?"
사내가 선영의 뺨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그녀는 잇새로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등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테이블이었다.
사내는 그녀를 테이블에 눕히다시피 기대놓고 혼이 빠져나갈듯 깊게 키스를 퍼부었다.
"이걸로 작별을 고해야겠군요, 내 두 번째 부인님. 처음부터 당신을 보는 내내 얼마나 동하던지 몰라…… 너무 튕겨서 애간장이 다 녹는줄 알았어. 당신은 모르지? 당신에게서 나는 피냄새가 얼마나 향긋하고 매혹적인지."
선영은 입술을 사려물었다.
"당신 전 부인도…… 당신이 죽였나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내가 이내 픽하고 웃었다.
"아, 그 돼지 말인가?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군. 내가 그년 비위를 맞추려고 밤마다 얼마나 좆질을 해댔는지. 덕분에 무자금치곤 제법 순수익이 좋았지만."
궁금한건 그게 끝인가? 사내는 포식자의 눈을 하곤 물었다.
선영에게서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자 그는 이내 품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그럼 정말 작별해야겠어. 고통없이 끝내주지."
사내의 칼 끝이 선영의 심장을 향하는 순간, 그녀의 시선이 사내의 어깨너머로 향했다.
"큭……."
피를 울컥 뿜어낸 사내가 경악한 눈을 하며 선영의 발치로 쓰러졌다.
체념한 듯 테이블 위에 힘없이 누워있던 선영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몸을 일으켜 사내의 앞에 섰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날 어디서 본 것 같았다고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요."
싱긋 웃은 선영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말한 그 돼지가 바로 내 언니니까요. 우린 알게모르게 많이 닮았거든요. 아, 그렇다고 해서 복수는 아니에요. 태어나서 딱 한 번 봤을 뿐이라."
사내에게서 시선을 돌린 선영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쥔 곰같은 덩치의 남자에게 다가갔다.
"수고했어요."
그녀는 남자의 목에 팔을 두르고 깊이 키스했다.
"완벽해요. 처음엔 이유가 좀 억지스러워서 걱정했는데 이젠 마음 놔도 될 것 같네요. 이렇게 완벽한 조건을 만들어 주시다니. 여기 내 사랑은 애인의 실종을 수상하게 여기고 당신의 집에 몰래 들어갔어요. 그리고 애인의 끔찍한 죽음,"
잠깐 말을 끊은 선영은 혐오스런 눈으로 선반 위의 병들을 바라보았다.
"을 보고 격분해서 당신을 찔러죽인 거예요. 정말 딱이네요. 당신이 가진 그 엄청난 돈, 감사히 쓸게요. 억울해하진 말아요, 어차피 언니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동생인 내게 오게 되었을 돈이란 말이에요."
곰같은 덩치의 남자가 낄낄 웃으며 선영을 껴안았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형형한 눈빛으로 선영을 쏘아보았다.
"그럼…… 현진이를…… 죽인 것도…… 네 짓이냐……."
선영은 과장되게 놀란 얼굴을 했다.
"설마 그걸 이제야 아셨단 말인가요? 난 의붓아들에게 그 많은 돈을 나눠줄 생각따위 요만큼도 없다구요."
나도 이이에게 시키면서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어요. 내 조카이기도 해서 그런가, 너무 마음이 아프더군요. 찢어질 것 같았다구요. 선영이 덧붙였다.
"정말 악취미야."
남자가 말했다.
"뭔가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나도 이 정도일줄은 몰랐어요. 흡혈이라니. 저 머리들은 감상용인가? 하나같이 예쁜 얼굴들이네요. 주인의 얼굴을 보면서 그 피를 마신다라……."
선영이 과장되게 몸서리를 쳤다.
"아무튼, 몇 년만 살다와요. 그런 후에 우리 결혼해요. 당신은 내 남편이 되고, 이 집의 주인이되는 거예요."
선영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여자들은 알면서도 속아. 뻔히 나쁜남자란걸 알면서도 사랑에 빠져버리지…… 하지만 남자들은 몰라서 속는단 말이야.'
그녀는 남자와 사내를 힐끗 번갈아보며 싱긋 웃었다.
終
기괴한담奇怪寒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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